책 한권이 그들의 인생을 바꿨다

박훈상기자 입력 2014-11-27 03:00수정 2014-11-2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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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남부교도소 구매 인기도서 분석
‘마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이다. 순식간에 인생 여정이 180도 바뀌어 버린 날. 무언가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세상 모든 화살이 나에게만 돌아오는 것 같았다.’

21일 서울 구로구 서울남부교도소에서 만난 수용자 한모 씨(47)가 노트에 쓴 일기다. 그는 “한때 마음을 잘못 먹어서 여기에 왔다. 줄곧 남 탓만 했는데 종교, 인문학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찬국 서울대 교수의 ‘초인수업’을 읽고 있었다.

“지금까지 안락함만이 행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짧게 살아도 자신의 생명력이 고양되는 삶을 살아야 그것이 행복임을 배우고 있어요. 중학교 때 추운 크리스마스 새벽 신문을 돌리던 날이 비록 힘들었지만 행복했음을 이제 알았습니다.”

오카자키 다케시는 저서 ‘장서의 괴로움’에서 옥중에서 역작을 써내거나 전 생애를 결정짓는 독서체험을 한 경우가 적지 않다며 이상적인 서재로 교도소를 소개한다. 실제로 교도소 밖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지만 교도소 안 독서 열기는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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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수용자는 교도소 비치도서를 읽거나 영치금으로 책을 직접 구입해서 읽는다. 서울남부교도소의 수용자는 1000여 명. 월평균 비치도서 대출이 300여 권이고 자비부담 도서 구입이 1100여 권으로 수용자 한 명당 1.4권의 책을 읽는 셈이다. 성인 월평균 독서량 0.8권에 비해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독서와 멀게 만드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쓸 수 없고 TV도 정해진 시간 외엔 볼 수 없어 자연스럽게 책이나 신문 잡지를 읽는다.

서울남부교소도의 올해 수용자 자비부담 구입 도서 1위는 남성 잡지 ‘맥심’이다. 그 외 상위권도 만화나 무협소설이 차지했다. 이를 제외한 일반도서 중 ‘교도소 베스트셀러’에는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비롯해 강신주의 ‘강신주의 감정수업’, 최윤식의 ‘2030 대담한 미래’ 등이 올랐다. 상위 20권까지의 책을 보면 종교 인문학 문학 실용서 등이 고른 분포를 보였다.

최찬희 사회복귀과장은 “잘못된 길로 한참 간 수용자들이 교도소에 와서야 비로소 멈추고 자기 수양의 시간을 갖다 보니 책 ‘멈추면…’의 제목에 많이 공감한 것 같다”며 “수용자의 연령, 학력, 관심사가 워낙 다양해 교도소 베스트셀러도 다양한 서적이 고르게 포함됐다”고 말했다.

의정부교도소에 수감 중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옥중에서 집필한 책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을 출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교도소에 입감된 고위 관료나 경제인들은 다른 수용자보다 더 독서에 열을 올린다. 교도소에 복역 중인 한 사회지도층 인사의 독서 목록을 확인해 보니 그는 올해만 40여 권의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구입 도서도 인문학 책인 ‘강의: 나의 동양 고전 독법’부터 베스트셀러 ‘살인자의 기억법’까지 다양했다.

서울남부교도소는 독서가 수용자 감화에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 독서와 관련한 편의를 최대한 제공하고 있다. 일주일에 2, 3권의 책을 읽는 수용자 신모 씨(57)는 “인생에 걸림돌 같던 교도소가 독서를 통해서 내게 디딤돌이 됐다”며 “방황하는 인생의 여정을 독서와 인문학이 밝혀주고 있다”고 말했다.

21일 서울 구로구 서울남부교도소 내 집중인성교육실에서 수용자 30여 명이 박종소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의 인문학 강의를 듣고 있다. 서울대 교수 10명이 10주 동안 강의하는 이 프로그램에 대한 수용자들의 관심과 집중도는 매우 높았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인문학과 만나니 새로운 내가 보여”▼

서울대 교수들이 여는 교도소 인문학 강의
2013년 7월부터 10주 간격 진행… 책 읽은 뒤엔 독후감 써 낭독


“톨스토이는 평생 자아를 찾으려 했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인간의 참모습을 찾을 때 행복합니다. 한 번 왔다가 가는 인생에서 나를 알아가는 것은 중요한 가치입니다. 고민해보세요. 가슴속에서 따뜻한 것이 차오를 겁니다.”

21일 서울남부교도소 집중인성교육실. 박종소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를 주제로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었다. 강의가 오전 10시부터 2시간 가까이 진행됐지만 푸른 수의를 입고 하얀 운동화를 신은 수용자 32명은 박 교수의 한마디라도 놓칠까 봐 열심히 메모하며 집중했다. 강의에 참석한 수용자들은 30∼60대로 사기 절도 폭력 성폭력 살인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왔다.

수용자를 위한 특별교육 프로그램 ‘마아트’(Maat·도(道)를 뜻하는 고대 이집트어)는 지난해 7월부터 서울대와 법무부의 업무협약으로 시작됐다. 기수별로 서울대 교수 10명이 무보수로 인문학 강의를 10주간 진행한다. 현재는 4기. 수용자 최모 씨(61)는 “교도소에서 인문학과 독서를 만나 새로운 나를 찾고 있다”며 “복역 기간 4년이 짧은 것 같다”고 했다.

수용자는 정해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한다. 우수한 독후감은 직접 수용자가 강의 시간에 낭독한다. 헨리 나우웬의 ‘탕자의 귀향’을 읽은 한 수용자는 “교수님들이 이끄는 길을 따라가 보니 내게 마음의 장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지금의 자리에서 인간의 바른 문양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썼다.

프로그램 주임교수인 배철현 서울대 교수는 “사람마다 이기심이란 감옥에 살고 있는데, 교도소는 인간을 집중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며 “어쩌면 수용자들은 자신을 깊숙이 묵상하고 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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