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01>향긋이 나직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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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긋이 나직이
―앨프리드 테니슨(1809∼1892)

향긋이 나직이, 향긋이 나직이,
서쪽 바다로부터 부는 바람,
나직이 나직이 숨쉬고 불어라.
서쪽 바다의 바람아!
구르는 물결 불어 넘어서
저무는 달 너머로부터
내게 다시 그이를 데려다 주렴.
나의 아기 귀여운 내 아기 잠든 사이에.

자거라 자거라 편히 자거라.
이제 곧 아빠가 네게로 오신단다.
쉬어라 쉬어라 엄마 품속에,
아빠가 네게로 오신단다.
은빛 달 아래 서쪽에서
은빛 돛들 무리져 오면.
자거라 내 아기, 자거라 예쁜 아기, 어서 자거라.

자장가들은 왜 이리 슬플까. 하루 일과에 지친 몸으로 젊은 여인이 아기를 고운 꿈속에 들게 하려는 밤, 너무나 보드랍고 연약한 아기와 잠을 어루만질 때 잠의 이웃인 죽음이 아기와 엄마를 기웃거리는 듯이. 자장가는 아기에 대한 사랑의 노래일 뿐 아니라 노동요이기도 하다. 칭얼거리며 쉽게 잠들지 않는 아기를 어르고 달래 재우는 건 지루하고 고된 일이다.

달콤한 덕담으로 가득한 자장가도 어딘지 슬픈데, ‘향긋이 나직이’는 슬픈 서사를 담고 있다. 화자는 남편이 타고 나간 배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뱃사람의 젊은 아내다. 달도 기울어가는 새벽, 슬픔과 걱정과 그리움으로 잠 못 이루는데 남편이 떠나간 서쪽 바다에서 산들바람이 하염없이 불어온다. 남편의 체취를 잡아채려 화자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을 테다. ‘향긋이 나직이 향긋이 나직이’ 서쪽 바다의 바람아, 그이를 아기와 나에게 데려와 다오.

테니슨의 서사시 ‘이노크 아든’은 이 시의 후일담 같다. 풍랑을 만난 뒤 10년이 지나도록 소식 없던 이노크가 돌아온다. 오랜 세월 고생을 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변한 모습으로. 너무도 그리웠던 아내와 아이들. 그러나 제 가족이 제 친구와 새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이노크는 발길을 돌리고, 쓸쓸하게 죽어간다.

택시를 타면 운전석 앞 유리창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작은 패널이 떠오른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어린 사무엘’ 그림 여백에 ‘오늘도 무사히’라고 적혀 있었다. 가족의 간절한 기도가 담긴 ‘오늘도 무사히’…. 독자 여러분, 새해에도 무사히!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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