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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뉴스룸/이재명]윤 선생의 마지막 애국심

입력 2013-05-16 03:00업데이트 2013-05-1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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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치부 기자
‘윤 선생 영어교실’이 새삼 화제다. 같은 듯 다른 세 단어가 있다. grip, grasp, grab. 모두 ‘잡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grip은 손잡이가 있는 물건을 견고히 잡을 때 주로 쓴다. grasp는 ‘기회를 잡다’와 같이 간절함이 담겨 있다. grab는 빠르게 잡는다는 의미다. 허락 없이 남의 엉덩이를 잡을 때처럼. 엉덩이를 뜻하는 고상한 단어 buttock도 덤으로 배웠다. 이 단어는 s를 붙여 주로 복수형으로 쓰인다. grab buttocks!

우리에게 이 단어들의 용법을 확실하게 알려준 윤 선생은 다름 아닌 윤창중이다. 국격(國格)과 바꿔 먹은 단어들이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윤 선생의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 미국 방문 동행기자로 한미 정상의 공동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그와 함께 백악관 브리핑룸에 갔을 때 그가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봤다. 평소 그답게 말을 아끼고 웃음으로 때웠다.

한미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다지만 조간신문 기자에겐 큰 괴로움이었다. 정상회담은 한국시간 8일 0시 반에 시작됐다. 8일자 신문에 기사를 실으려면 사전 브리핑이 필요했다. 정상회담이 열리기 4시간 전 윤 선생이 프레스룸에 나타났다. 진짜 괴로움은 그때부터였다. “나눠준 자료대로 바로 쓰면 돼. 내가 기사체로 다 만들어 왔어. 역대 이런 대변인 봤어?” 그의 우쭐거림이 영 거슬렸지만 마감시간에 쫓겨 말을 섞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기자 생활 14년 동안 이런 대변인은 처음이다. 지난달 말경 청와대 기자실에서 기사를 쓰고 있는데 그가 내 자리로 왔다. “너 인터넷 기자야?” 뜬금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알고 보니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백악관 대변인은 기자들과 끊임없이 토론한다는 한 특파원의 칼럼을 인용한 부분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백악관 브리핑룸 앞에서 그가 나를 불렀다. 여전히 앙금이 남은 것이다. “백악관 대변인은 다를 것 같아. 천만에! 나랑 똑같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 이게 성추행 의혹 사건이 터지기 전날의 일이다.

그는 11일 기자회견에서 성추행이 없었다며 ‘윤창중 이름 석 자’를 걸고 맹세했다. 그다운 맹세다. 누군가는 홍보를 을(乙)의 종합예술이라 했지만 그에게 홍보란 갑(甲)의 자기과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만 알고, 나만 말하고, 나만 옳은.

성추행의 진실 못지않게 그의 진심이 궁금하다. 그는 기자회견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제 양심과 도덕성과 애국심을 갖고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겠다.” 하루빨리 미국으로 건너가 자진 조사를 받는 게 그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애국심이다.

이재명 정치부 기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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