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19일 오전 7시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사상구의 한 아파트 경로당에서 투표를 마친 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진인사(盡人事)했으니 대천명(待天命)해야죠”라고 말했다. 역전승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을 드러낸 발언이지만, 막판 뒤집기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대선에서 패한 문 후보는 일정 기간 휴식기를 가진 뒤 훗날을 기약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역구(부산 사상)를 가진 현역 국회의원이고, 아직 59세로 젊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장’인 문 후보가 범야권이나 민주당의 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반여(反與) 정서가 높은 상황에서 범야권이 총력 체제로 문 후보를 지원했음에도 패한 것은 좀처럼 회복하기 힘든 큰 상처일 수밖에 없다.
당장 민주당 내에선 친노(친노무현) 책임론이 거세게 일면서 당이 친노 대 비노(비노무현)로 갈려 내홍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문 후보는 9월 당 대선후보 확정 직후부터 모든 계파, 세력이 어우러지는 ‘용광로 선대위’를 표방했지만 실상 선거는 친노 몇 사람이 주도하다시피 했다. 다수의 비노 인사들은 이렇다 할 직함도 맡지 못한 채 밖에서 맴돌았다. 문 후보는 시종 ‘국민통합’을 강조했지만 정작 ‘당 통합’에는 실패한 것이다. 과거 민주당에서 당 대표, 국회의원을 지낸 인사들이 줄줄이 ‘적진’인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측으로 가는 데 대해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심지어 문 후보는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다”고까지 했다.
이런 점을 들어 당내에선 선거 전부터 “민주당을 위해서는 이기는 게 능사만은 아닐 것”이란 얘기마저 돌았다. ‘친노의 득세’로 대선에서 승리한들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느냐는 얘기들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분신’과도 같은 문 후보에게 친노란 친위세력이 전면에 나서면서 여당이 내세운 ‘노무현 정부 시즌2’ 비판에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선거를 앞두고 일부 비주류 의원은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신그룹인 동교동계가 “집권 시 임명직 공직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처럼 특단의 대책을 요구했지만 친노 핵심들은 “그렇게는 못 한다”며 일축했다고 한다. 한 비주류 인사는 “친노 그룹이 지나치게 안이했다. 친노에 대한 국민적 반감과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조치가 전혀 없었다”며 “핵심 보직을 맡은 인사들도 집권 시 친노 핵심들이 자신의 입각 등을 반대할까 봐 ‘꿀 먹은 벙어리’로 지내더라. 집권을 해야 입각도 가능한 것인데…”라며 혀를 찼다. 당 일각에서는 폐족 위기에 몰렸다가 노 전 대통령 서거를 통해 일시 탈출했던 친노들이 영원히 퇴출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민주당 지도부가 현재 공백상태란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해찬 전 대표 등 지도부가 일괄사퇴한 당의 상황은 야권의 새판 짜기를 가속화할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문 후보가 지난달 18일 이 전 대표의 사퇴 이후 겸해온 당대표 권한대행직을 내놓을 경우 당이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되면서 당내 권력투쟁도 조기에 촉발될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내년 1월 중순으로 예상되는 새 지도부 선출 전당대회가 민주당의 새로운 권력지도를 가늠하는 1차 분수령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당내 비주류 일각에서 안철수 전 후보를 상수로 놓고 야권의 새판 짜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놓을 공산도 크다. 안 전 후보는 단일화 이전 친노 그룹의 계파주의를 맹비판하면서 이 전 대표 등의 용퇴를 직간접으로 요구했고, 민주당 비노 그룹이 안 전 후보의 주장에 동조했다. 일각에선 친노 그룹만 배제한 신당이 출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민주당에선 더이상 단일화에 매몰되지 않고 자력으로 승부를 낼 수 있도록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선거 때마다 정책은 도외시한 채 ‘닥치고 단일화’를 외치며 지나치게 힘을 빼다 보니 정작 본선에선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당직자는 “야권 단일대오를 형성하고도 4월 총선에 이어 대선에서도 패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선거에서는 졌지만 폭넓은 중도층을 파고드는 현실성 있는 정책과 비전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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