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이 답한다]17세기 중엽까지 남녀평등 재산상속 부녀자의 이혼과 재혼 자유롭게 했다

동아일보 입력 2012-12-19 03:00수정 2012-12-19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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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최근 해주 정씨 대종가의 고문헌에서 조선 초기에 이혼한 여인 정씨의 ‘영응대군 기별부인 정씨 분급문기’(永膺大君棄別夫人鄭氏分給文記·1494년)가 발굴돼 화제가 됐다. 성리학 이념이 확산되기 전인 조선 초기 이혼과 재혼의 양상에 대해 알고 싶다. (ID: kt27**) ▶본보 12월 10일자 A12면 조선의 이혼녀들 당당?… 세종 며느리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책임연구원
부모가 자식에게 남긴 재산 상속 문서를 분재기(分財記)라 한다. 분재기에는 당시의 사상과 관행, 작게는 친족 내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해주 정씨 대종가에서 발굴된 조선 초기 분재기 70여 점은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특히 가족 내에서 여성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연구 가치가 높다.

세종대왕의 8번째 아들 영응대군은 정씨 부인과 이혼장을 쓰고 헤어졌다. 이혼할 때 부부가 합의하에 작성한 계약서, 즉 이혼장을 당시 ‘기별명문(棄別明文)’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와 고려 시대에는 이혼과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여성의 이혼이 가능했던 가장 큰 요인은 경제력이었다. 이혼 후 먹고살아갈 재산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17세기 중엽 이전에는 재산 상속에 있어서 남녀 간 균분(均分), 즉 딸과 아들 구분 없이 평균해서 상속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여성은 시집을 갔어도 친정에서 상속받은 자기 재산의 처분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재산의 중요 항목은 노비와 전답, 가사(家舍) 등이었다. 여성이 처분권을 가졌다는 말은 재산을 상속하거나 매도할 때 여성이 주간하거나 최소한 동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재주권(財主權)이라 했다. 이에 당시 분재기에 재산 항목을 기록할 때 여성의 몫을 남성의 몫과 구별하여 ‘모변(母邊)’ 또는 ‘처변(妻邊)’에 기록하는 것이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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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속 관행이 여성의 지위를 뒷받침하고, 나아가 이혼을 비교적 자유롭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해주 정씨 부인도 친정 부모에게서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고, 이혼 후 그녀 몫의 모든 재산을 다시 가지고 왔던 것이다.

당시 재산 상속 문서에는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와 제사를 모실 의무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여성 몫의 재산이 줄어든 것은 의무 사항인 제사 주간자로서 여성의 지위가 해체되거나 느슨해지면서부터였다. 그 시기는 조선 사회가 성리학적인 사회로 정착되는 17세기 중엽 이후였다. 이때 성리학이란 주자학을 말하며, 가정의 분재 관행에 직접적 영향을 준 것은 주자가례였다. 주자가례가 우리 가정의 실생활에 반영되기 전에는 이혼과 재혼이 가능했다. 조선 전기의 족보에는 이혼한 부인의 전남편이 전부(前夫), 뒤의 남편이 후부(後夫)라고 표현되어 있다. 남성의 입장에서 전처, 후처라는 말과 동일선상에 있는 용어인 것이다. 기별부인이란 단순한 단어인 듯하지만 여성사적 의미는 크다. 여성이 누구의 딸이나 누구의 부인이라는 종속적 인물이 아니라 ‘이혼한 부인’이면서 독자적 권리를 갖춘 여성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책임연구원

※ 질문은 e메일(savoring@donga.com)이나 우편(110-715 서울 종로구 세종로 139 동아일보 문화부 ‘지성이 답한다’ 담당자 앞)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조선시대#남녀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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