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한줄]‘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동아일보 입력 2012-11-17 03:00수정 2012-11-1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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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가든 ‘Black Hole Sun’(1994년)
아버지…

#1 그해 여름 태양은 너무 뜨거웠다.

새벽 어스름 무렵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방에서 자고 있는 날 깨웠다. 내가 아니라, 이제는 일어날 수 없는 아버지를 깨우려는 듯 어머니의 목소리에 원망 섞인 힘이 들어가 있었다.

택시가 뚫고 가는 푸른 새벽안개는 “오늘도 꽤나 덥겠구나” 하는 예감을 줬다. 그날따라 병원 냄새가 더 독하게 느껴졌다. 병실 문을 열고 마주한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죽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나는 혼자 병상에서 사람 키 하나 거리만큼 떨어져 멀뚱히 서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저렇게 터무니없는 부동자세로 굳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흐느낌이 먹먹하게 멀리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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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례는 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렀다. 평소 교류가 없던 친척들이 찾아와 곡을 했다. “아이고, 아이고. 우리 ○ 서방 불쌍해서 워떡혀. 아이고.” 처마 끝으로 비구름이 몰려왔다. 처마와 하늘 사이의 경계는 낯선 팝아트 작품 속 선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아버지는 이쪽 세상에서 처마 끝에 걸리지 못하고 선을 넘어 저 멀리로 빨려 올라갔다.’ 눈물이 조금 나왔다. 8월의 마지막 장마가 몰려오고 있었다.

#3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아버지가 인사부에 있던 시절에는 우리 집 계단참에 사과 박스나 배 박스가 몇 개씩 쌓여 있었다. 거기엔 진짜 탐스럽게 생긴 사과나 배가 들어 있었다. 까끌까끌한 쌀겨 속으로 손을 넣으면 반질반질한 사과 알이 반갑게 잡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나라에서 주는 청백리상을 탈 뻔도 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편이었다. 크게 화를 내거나 크게 기뻐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 9시 뉴스에 대통령 각하의 얼굴이 나올 때만큼은 ‘저 ××’ 하며 몇 마디 거친 말을 입밖에 내셨다.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이웃을 볼 때도 아버지는 좀처럼 내지 않던 화를 냈다. 어머니는 “아버지는 정의감이 매우 강한 분이지만 집안에서는 너무 무뚝뚝하다”고 했다. 나는 차갑고 강직한 아버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따뜻한 어머니 쪽이 내가 기대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다.

#4 록 밴드 ‘사운드가든’은 1984년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결성됐다. 1년에 150일은 비가 내리고 200일은 흐린 도시 시애틀. 냉소적이거나 자기 파괴적인 가사, 헤비메탈과 인디 록을 섞은 일그러진 음향과 낙폭이 큰 악곡 구조를 지닌 음악 장르인 ‘그런지’가 태동한 곳이다. 사운드가든은 ‘너바나’, ‘펄잼’ 같은 동료 그런지 그룹들과는 다른 아우라를 뿜어내는 팀이었다. 기
타리스트 킴 대일의 건조하면서도 환각적인 연주에 얹히는 보컬 크리스 코넬의 노래는 쓸쓸한 읊조림에서 광폭하고 날카로운 포효로 신경질적으로 변하곤 했다.


#5
아버지는 ‘블랙홀 선’을 듣지 못했다. 사운드가든의 1994년 명반 ‘슈퍼언논’에 실린 이 곡을 나는 그날 마침내 비가 내리기시작한 장례식장 바깥에서 곡(哭) 대신 끝없이 읊조렸다. 날 구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블랙홀 태양, 이리 와서 비를 쓸어가줘. 블랙홀 태양, 오지 않을래?’ ‘웅얼거리는. 차갑고 눅눅한. 따뜻한 바람을 훔쳐, 지친 친구.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때론 뱀에게는 너무나 먼 길. 내 신을 신고 잠든 채로 걸어가. 내 젊음을 지켜 달라고 기도해. 천국은 지옥을 날려 보내. 너처럼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더이상 없어.’ 비는 그치지 않았다. 빗소리와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 친지들의 흐느낌은 점점 귀청에서 멀어져 갔다. ‘블랙홀 태양, 이리와줘. 이리 내려와 줘.’

임오션 음악이 내가 꿈꾸는 바다. theugly7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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