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차지완]영웅을 기억하는 방식

동아일보 입력 2012-11-13 03:00수정 2012-11-1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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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완 사회부 기자
북받치는 슬픔을 억누르며 애써 친절하게 설명해 주려는 그녀의 모습이 5개월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동료의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는 떨렸고, 눈물도 주르륵 흘러내렸다.

6월 23일 미국 시애틀 남쪽의 레이니어 산 국립공원. 미 서북부의 최고봉(해발 4392m)인 눈 덮인 설산은 등반가에겐 정복하고 싶은 치명적 유혹이다. 1년간의 미국 연수생활을 마치고 귀국길에 들렀던 이곳에서 우연히 어느 영웅의 죽음과 마주쳤다. 이틀 전 갑작스러운 폭풍우로 고립된 산악인 4명을 구조하다가 900m 아래 협곡으로 추락해 숨진 산악구조대원 닉 홀(33).

그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방문객센터 앞에 조기로 걸린 성조기가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왜 조기가 걸려 있죠”라고 묻는 기자에게 동료 산악구조대원은 슬픔을 삭이며 사연을 들려줬다. ‘닉 홀, 당신은 영웅이에요’라고 적힌 전광판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그들은 국기를 조기로 거는 최고의 예우로써 영웅을 기리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이달 초 한 명의 영웅이 안타깝게 삶을 마감했다. 인천의 한 물류창고 지하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다가 숨진 김영수 소방경(54)이다. 동료들은 “가장 앞장서서 화재를 진압했고 가장 늦게까지 현장을 지켰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김 소방경의 장례 기간에 태극기는 조기로 게양되지 못했다. 그가 일했던 부평소방서 산하 6개 119안전센터에 소방기 조기가 게양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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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중순엔 전주 덕진경찰서의 이상열 경위(58)가 과로로 숨졌다. 그는 지난해 범죄자 115명을 붙잡아 전북경찰청 형사활동평가 1위에 올랐다. 전국 강력계 형사 7600명 중 분기별로 탁월한 사건 해결 능력을 보인 1명에게 수여하는 ‘베스트 참수리’에도 3년간 6차례 선정됐다. 그가 이승을 떠나는 길에도 태극기 조기는 게양되지 않았다.

소방방재청과 경찰청에 그 이유를 물었다. “당연히 조기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죠. 그런데 법률에 규정이 없어서요.” 영웅의 죽음 앞에서조차 관료주의 때문에 조기를 걸지 못하는 사회라니….

대한민국국기법에 따르면 태극기 조기는 현충일처럼 정부가 따로 지정한 날이나 지방의회의 조례 또는 의결을 통해 게양할 수 있다. 눈 밝은 지방의회 의원이라면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조기를 걸자고 했을 텐데, 우리 사회는 아직 그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아마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현장 경찰과 소방관들의 한숨이 가슴을 더 먹먹하게 했다. 그들은 그런 처우에 익숙하다.

미국에선 경찰이나 소방관이 순직했을 때 카운티나 타운 단위로 조기를 내거는 게 일상화돼 있다. 200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 시에서 20대 청년의 총격으로 경찰 4명이 숨지자 아널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주 정부 청사에 조기 게양을 지시하기도 했다.

경찰관 소방관 군인 산악구조원 등은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국가에 헌신하는 ‘MIU(Men In Uniform·제복 입은 사람들)’이다. 동아일보와 채널A가 ‘영예로운 제복상’을 제정해 올해 초 처음 시상한 것은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제 우리의 영웅들이 떠나는 길에도 조기를 걸어 줄 때가 됐다. 나라에 목숨을 바친 영웅과 그 아픔을 평생 간직하고 살아갈 유가족에게 태극기로 마지막 예우를 표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의무다.

[채널A 영상] 소방관 또 화마에…동료가 말하는 ‘그 때’

차지완 사회부 기자 cha@donga.com
#소방관#순직#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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