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맛]곰탕집서 처음 만난 그 박하향

동아일보 입력 2012-10-26 03:00수정 2012-10-2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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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스 빈야드 카베르네 소비뇽 1991
와인을 맛보고 상품성을 논해야 하는 직업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와인을 맛볼 수 있었다. 반복적으로 와인을 시음하고 관찰하다 보면 와인에 대한 정서적 감흥은 차츰 사라지게 마련인데 이따금 예술의 경지에 오른 와인들은 잠시 평가라는 펜을 내려놓고 그것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들어 와인장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선사하곤 한다. 그리고 때때로 예상을 완전히 넘어설 정도로 훌륭한 와인을 만나면 한층 겸허하고 열린 자세로 일을 대해야 한다는 다짐도 스스로에게 하게 된다.

미국을 대표하는 와인 산지 내파밸리의 맹주인 하이츠 셀라(Heitz Cellar)의 ‘마르타스 빈야드 카베르네 소비뇽 1991’은 내가 만난 숱한 와인 중에서 가장 뚜렷한 정서적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와인을 처음 만난 2001년 늦가을, 대기업에서 와인계로 갓 이직한 나는 유럽 와인들에 더 익숙해 있었는데 평소에 와인잔을 맡겨두고 자주 가던 곰탕집에서 곰탕과 수육을 시켜 놓고는 이 와인과 첫 대면을 하였다.

와인메이커가 일하는 모습이 그려진 갈색의 레이블은 장식적 요소 없이 진중한 느낌이었고, 레이블 한구석에는 와인의 생산량과 병입일에 대한 정보가 고집스레 표기되어 있었다. 잔에 따르고 서서히 잔을 돌려가면서 와인의 향을 먼저 느껴 보았다. 그 어디서도 느껴 보지 못한 뚜렷하면서도 매우 은은한 박하향이 느껴졌다. 종종 다른 레드와인에서 박하향을 느껴 보았으나 그 고급스러움과 향의 순수함에서 이 와인은 다른 차원에 속해 있었다.

박하향과 함께 다채로운 검붉은 과일들과 검은 올리브, 초콜릿, 흙냄새 등이 연출하는 향의 합주는 그야말로 탄성을 자아낼 정도였으며, 맛에서는 복합적이면서 유순한 과일 풍미가 단단한 골격의 타닌 위에서 인상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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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수입사 나라셀라의 신성호 이사가 와인을 시음하고 있다. 숱한 와인을 경험해 본 그는 “와인은 포도가 자라난 땅과 자신을 탄생시킨 사람을 닮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라셀라 제공
하지만 이 와인을 계속 마시면서 다른 와인에서는 느껴 보지 못한 묘한 느낌이 찾아왔다. 충분히 그 이상으로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도 있으련만 이 와인은 화려함을 내면으로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였다.

그동안 절제된 미학을 보여주는 와인을 많이 만나보았으나 이 와인은 그 와인들과 많이 달랐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순수한 아름다움은 마치 우리에 갇혀 있어도 창살을 뚫고 나오는 어쩔 수 없는 맹수의 본능과도 같았다.

부드러움과 강함, 슬픔과 환희, 사슴과 사자를 한 몸에 모두 품은 아이러니한 아름다움은 이내 이 와인을 내게 깊이 각인시켰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이 와인을 만든 조 하이츠란 인물은 1960년대 이래 미국 와인의 중흥기를 이끈 영웅 중의 한 사람으로 매우 진중한 성품으로 남 앞에 나서는 일이 많지 않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대신 묵묵히 포도밭과 양조장에서 다양한 실험과 창의적 시도를 통해 와인 품질을 크게 개선한 인물이었다.

자식이 부모를 닮듯 와인은 포도가 자라난 땅을 닮고, 생명을 불어넣어 준 양조자를 닮는다는 이치를 이 와인은 내게 가르쳐주었고, 이후 나는 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도와 토양, 양조와 관련한 기술적 측면 외에 와인을 탄생시킨 인물에 대한 이야기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정말 알면 알수록 와인은 사람을 많이 닮아 있다.

신성호 나라셀라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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