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칼럼/김근희]아버지의 삶에 얹혀진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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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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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희 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
김근희 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
바쁜 서울 생활에 지쳐 잠시 고향에 내려갔을 때였다. 일과를 마치고 심야버스를 탔다. 도착하려면 30분이나 남았는데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터미널에서 기다린다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차 불빛을 밝히고 기다리는 아버지 모습에서 위안이 느껴졌다.

집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다. 아버지가 왼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왼손으로는 짐 가방을 드셨다. 어두운 밤길 집으로 향하는데 아버지는 높은 구두를 신은 내게 오른손을 내미셨다. 잡고 걸으라고. 나도 아버지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와 손을 잡는 것이 뭔가 망설여졌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뺐다. “괜찮아”라며 먼저 걸어갔다.

생각해 보니 나는 대학에 들어온 이후로 아버지와 포옹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손잡는 것도 망설일 정도로 아버지와의 스킨십에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결코 아버지와 멀게 느껴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때 나를 망설이게 한 것은 일종의 부끄러움이었다. 스무 살 넘은 성인으로서 아버지와 손을 잡는 게 어쩐지 창피하게 느껴졌다. 아버지와 손을 잡는 게 마치 내가 아직 어린 꼬마아이인 것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최근 오랫동안 편찮으셨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이미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 상태지만 할아버지를 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할머니와 고모를 비롯한 식구들이 계속 울음을 토해 냈다. 옆에서 사람들이 우려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를 더 걱정스럽게 한 것은 아버지의 건강이었다. 아버지 몸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다. 병세가 악화된 할아버지를 돌보느라 한 달 정도 병원에서 꼬박 밤을 새우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아버지부터 쓰러지실 뻔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담담하게 감정을 추스르고 힘든 내색 없이 손님들을 맞았다. 아버지는 집안의 장남이었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힘든 것을 내색할 겨를이 없었다. 밤을 지새우며 조문객을 맞이하고 식장을 정리해야 했다. 장례를 마치고 나서는 아버지의 몸 상태가 더 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할머니 건강부터 챙기고 가족을 다독였다. 식구들이 방에 들어가 쉬고 있을 때 식장에 혼자 남아 뒷정리를 도맡았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처음으로 아버지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생각하게 됐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집안의 가장이면서 동시에 한 집안의 장남이고 의지하는 큰오빠였다. 누군가의 아들로서, 누군가의 오빠로서, 누군가의 남편으로서, 그리고 누군가의 아버지로서. 아버지는 여러 겹의 삶을 책임지고 있었다.

스무 살이 된 이후 나는 점점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것부터 고등학생 때와는 달랐다. 사회의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나도 사람들을 나누고, 사람들도 나를 나누었다. 그 기준에 맞춰 나가며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사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에게 기대곤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런 나의 삶의 무게를 나누어 짊어져 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산소 옆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이제 아버지의 삶의 무게를 덜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니 분명 아버지도 자신의 삶의 무게를 덜어 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할아버지를 잃은 아버지는 더 기댈 곳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자 나도 어른이라는 치기 어린 생각에 잡지 못했던 아버지 오른손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버지의 삶의 무게를 덜어 주는 건 이제 나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라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 드리는 데서 시작하지 않을까. 장례를 마무리하고 급히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다짐했다. 다음에 다시 고향에 내려가면 먼저 아버지 손을 꼭 잡아 드리겠노라고.

김근희 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
#심야버스#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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