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정훈]‘강간의 천국’

박정훈 사회부 차장

나는 강간범이다. 올해 마흔셋, 중국인 조선족이다. 서울 가산동에서 동거했던 여자가 헤어지자고 떼를 쓰기에 몇 대 때리고 성관계를 했더니 강간이라고 신고해 버렸다. '신고하면 죽인다'고 경고한 걸 허투루 들은 모양이다. 내 실수가 컸다. 제대로 가뒀어야 했는데 3일씩 붙잡아 놓다 보니 잠시 한눈판 사이 도망쳐 버렸다. 한국 경찰은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다는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동거했던 여잔데 강간이라니….

뜻밖에도 법원은 '도주 우려가 없다'며 나를 풀어 줬다. 경찰은 내가 협박했다고 수사기록에 썼지만 판사는 그렇게 보지 않았나 보다. 사실 붙잡아 놓고 때린 건 할 말이 없다. 판사에게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가만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곧장 실천에 옮겼다. 풀려나자마자 여자 집으로 갔다. 어디서 뭘 하는지 오전 1시가 돼도 올 생각을 안 한다. 2시 20분. 여자가 나타났다. 담벼락 뒤에 숨어 있던 나는 칼을 꺼내 단숨에 일을 마무리했다. 내가 '신고하면 죽인다'고 하지 않았나.

경찰은 숨어 있던 나를 금방 찾아냈다. 내가 보복할 걸 알고 있었던 듯했다. 형사들은 나를 붙잡아 놓고 한탄했다. "엉터리 판사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고. 내가 그 여자에게 보낸 '죽여 버리겠다'는 문자메시지를 경찰이 찾아서 수사기록에 넣었지만 판사는 못 봤다고 하는 모양이다. 한 형사는 "판사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겠지. 우리야 술 먹고 판사 욕하는 거 말고는 할 게 없지 않느냐"고 했다.

사실 그런 판사 덕 본 건 나만이 아니다. 서른두 살 먹은 경기 평택 병원의 남자 간호조무사라는데, 판사가 성폭행 당했다는 여자 진술 대신 그 녀석 말만 듣고 방어권 확보 차원에서 풀어 줬단다. 그 녀석한테 당한 여자는 며칠 전 "하늘에서 지켜보겠다"며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는데…. 유서를 다섯 장이나 썼다니 어지간히 억울했던 것 같다.

화간(和姦), 강간범에게는 참 쓸모 있는 말이다. 일단 그렇게 주장하면 판사도 무시하지 못한다. 사는 곳만 일정하면 판사 마음이 약해지는 모양이다. 거짓말탐지기에서 거짓 반응이 나왔다는데도 그놈 주장이 먹혔다니. 인권 선진국이라서 그런지 한국 판사는 피의자 인권엔 특히 관심이 많은 듯하다. 사람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강간범의 인권을 왜 법원이 신경쓰느냐"고 하는데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우리도 보통 때는 다른 사람처럼 울고 웃고 동정도 한다. 한국 판사들이 그걸 알아주니 고맙다는 거다.

나는 몇 달 사이 강간범에서 살인범이 됐다. 날 풀어준 1심 법원은 징역 25년형을 선고했다. 박모 판사는 풀어 줬는데 이번엔 김모 판사가 날 가뒀다. 그래도 죽이지는 않을 것 같다. 중국 같으면 사형시킬 텐데…. 중국에선 14세 미만 여자애와 잠자리만 같이해도 해도 사형이다. 내가 사고 친 게 한국이라 천만다행이다. 내 기대를 저버리진 않겠지만, 대법원이 사형을 선고해도 정부가 집행은 안 한다니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감옥에 오래 있겠지만 한국 정부가 주는 따뜻한 밥 먹고 두 발 뻗고 살면 된다. 대한민국, 알수록 참 묘한 나라다.

※4월 서울남부지법이 조선족 성폭행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한 다음 날 새벽, 피해 여성이 풀려난 피의자에게 처참하게 살해됐습니다. 이달 1일에는 수원지법 평택지원이 성폭행 피의자의 영장을 기각했고, 60대 피해 여성은 "법에는 기댈 곳이 없다"며 투신자살했습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채널A 영상]성폭행 당했던 그 병원에서 직접 현장검증까지…

박정훈 사회부 차장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