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후손 “35년만에… 나도 이젠 한국인”

  • Array
  • 입력 2012년 8월 14일 03시 00분


코멘트

■ 러시아서 태어나 한국 국적 받는 김율리아 씨

13일 한국 국적을 취득한 독립유공자 후손 김율리아 씨가 이날 오후 대구에서 KTX를 타고 올라와 서울역의 한 식당에서 독립유공자인 할아버지(왼쪽)와 할머니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
13일 한국 국적을 취득한 독립유공자 후손 김율리아 씨가 이날 오후 대구에서 KTX를 타고 올라와 서울역의 한 식당에서 독립유공자인 할아버지(왼쪽)와 할머니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
“아버지! 왜 아버지 배는 먼 바다까지 못 가요?” 1988년, 러시아 연해주의 추코트 반도 인근 항구. 작은 고깃배의 선장(船長)이던 김율리아 씨(35·여)의 아버지는 어린 딸의 질문에 한참을 답을 못하다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이름은 ‘김아파나시’야. 1938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열한 살이 된 김 씨를 앉혀두고 처음으로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1919년 3월 17일, ‘대한독립 만세’ 함성은 러시아 땅에서도 울려 펴졌다. 그 가운데 김아파나시 선생이 있었다. 선생은 국내에서 3·1운동이 시작되자 청년단체들과 손잡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비록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 국적을 가졌지만 조국의 현실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그는 일본 경찰이 3·1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것에 대한 항의문을 일본영사에게 전달했고, ‘학생과 목소리’라는 일제의 침략상을 낱낱이 기록한 항일신문도 만들었다.

하지만 19년 뒤 선생은 하바롭스크에서 소련군에게 총살당했다. ‘일본 첩보기관을 위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누명 때문이었다. 선생의 아들은 부친의 무죄를 입증하는 서류를 러시아에 제출해 1957년에야 억울함을 벗었다. 한국 정부도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율리아 씨의 아버지가 먼 바다로 나가지 못한 것은 그 일 때문이었다. 간첩 혐의는 공식적으로 ‘없던 일’이 됐지만 김 씨 가족은 ‘브라가 나로다(민중의 적)’로 불리며 한동안 러시아에서 손가락질을 받았다. 배를 타게 해주되 ‘먼 바다로 나가지 말고 러시아 인근만 항해할 것’이라는 조건도 바뀌지 않았다.

결국 선장 일을 그만둔 김 씨의 아버지는 연해주에 정착하려는 고려인들을 돕겠다며 나섰다. 농사를 지으려는 고려인들에게 씨앗을 주고 정착 기금을 조성했다. 김 씨는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이기에 나와 가족을 이렇게 슬프게 할까.’

김 씨는 러시아극동대에 다니던 1998년 처음 한국을 찾았다. 친절하고 정겨운 한국인에게 끌렸다. 한국인 남편을 만난 4년 전부터는 아예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취직은 힘들었고, 한국말이 서툰 까닭에 귀화시험을 치르기도 쉽지 않았다. 김 씨는 “그저 외국인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두렵고 외롭기도 했다”고 한국 생활을 돌이켰다.

광복절을 앞둔 13일, 법무부는 과천 청사에서 김 씨와 같이 한국 국적이 없어 어려움을 겪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한국 국적을 수여했다. 이날 수여식에는 부산 동래 구포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1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한 박도백 선생의 후손 박승천·금련 씨, 중국 지린 성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통신·첩보 활동을 하다 일본군에 총살당한 이여락 선생의 후손 남여락·범수 씨 등 12명도 참석했다.

이날 국적증서를 받기 위해 법무부를 찾은 김율리아 씨는 서툰 한국말 대신 삐뚤빼뚤한 한글로 기분을 표현한 쪽지를 기자에게 건넸다.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오늘, 저한테는 매우 특별하고 행복한 날입니다. 우리 가족에게 커다란 영광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
#김율리아#독립유공자#광복절#고려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