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남파공작원 출신 김동식 “北 ‘주체-세습-인권 등 5가지 비판 말라’ 南지하당에 지령”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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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은 헌법기관 北연계 의혹 털어내야
■ 北 남파공작원 출신 김동식 씨 인터뷰

《 통합진보당 일부 의원 당선자들의 과거 ‘주체사상파 행적’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일부 보수우파 인사들은 “이들이 19대 국회에서 북한과의 직간접적인 연계하에 상임위 활동 등으로 얻은 정보를 북한 측에 유출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이에 진보좌파 쪽에선 ‘해묵은 색깔론 제기’라고 반발한다. 하지만 통일운동을 하는 시민단체나 좌파정당의 일반 구성원과 국회의원은 명백히 다르다. 먼저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다. 이들은 각자 법안을 발의할 수 있다. 한 명의 국회의원은 보좌진 월급까지 매년 5억 원 정도의 국민세금을 쓴다. 최고 국가기밀에 접근할 수도 있다. 적어도 국회의원에 대해선 철저한 검증이 필요한 이유다. 남파 공작원 김동식 씨 인터뷰는 이런 맥락에서 추진됐다. 》
[채널A 영상] “통합진보당에 北지하조직 출신 여럿”

“북한의 광명성 3호 미사일(로켓) 발사 때 왜 유독 통합진보당만 북한을 감싸는 논평을 냈다고 생각하세요?”

북한 조선노동당 소속 대남 공작원이었던 김동식 씨(47)는 16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이렇게 되물었다. 북한 노동당 사회문화부 대남공작과 소속이었던 그는 1990년과 1995년 두 번 남파됐으며 1995년 충남 부여에서 총격전 끝에 붙잡힌 뒤 남한에 정착했다. 그는 “민주노동당 때부터 통진당의 궤적을 보면 지도부 중 일부가 북한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면서 “그런 게 아니라면 통진당 인사들이 북한 문제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가이드라인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1990년대 초 남한 내 지하세력으로부터 ‘동유럽이 무너지고 북한 국력은 약해지면서 북한에 대한 여러 비판이 제기되는데 무작정 버티기가 난감하다. 어느 정도까지 북한 비판에 동참해도 좋은가’라는 질문이 전달돼 왔다. 당시 북한 노동당은 내부 토론 끝에 ‘북한의 경제난을 포함해 일반적인 것은 비판해도 좋다. 그러나 부자세습, 주체사상, 정치체제, 북한 인권, 북한 지도자 등 5가지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말라’는 지령(가이드라인)을 내려보냈다. 통진당을 보면 김정은 3대 세습 문제나 탈북자 북송 등 북한 인권에 대한 지적이 없다.”

그는 이어 통진당의 핵심 멤버인 ‘민혁당’ 출신 인사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혁당은 1992년 결성된 지하당. 통진당 비례대표 당선자인 이석기 씨, 이의엽 현 통진당 정책위의장, 19대 총선에 울산 북구에 출마한 김창현 전 구청장 등이 민혁당 출신으로 알려졌다.

―대남공작과 소속이었다는데….

“대남공작과는 남파공작원이 포섭해 온 남한 내 지하 세력을 관리하고 보고받고 지령을 내리는 일을 한다. 1991년 북한에 올라와 김일성을 만나고 1992년 민혁당을 만든 김영환 씨를 포섭한 사람이 윤택림이다. 그는 내가 근무할 당시 대남공작과 과장이었다. 과장이면 우리나라 부처 국실장 급으로 보면 된다.”

[채널A 영상] 색깔론 들고 나온 하태경 “통진당에 北지하조직 출신 많다”

―북한의 대남공작 전략은 무엇인가.

“북한에선 1990년대 초반 지하조직은 유지하되 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대중혁신 정당을 만드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폭동, 쿠데타, 전쟁 등 폭력적인 방법으로 한 번에 정권을 바꾸는 일이 힘들어지자 선거를 통해 국회에 진출해 서서히 정권을 뒤집자는 전략으로 수정한 것이다.”

―그렇게 만든 대중혁신 정당은 무엇인가.

“민중당이다. 민중당 핵심 인사 몇 명을 통해 지령을 내렸다. 1991년 가을 대남공작과 1개 팀이 담당했다. 돈도 내려보냈다. 사회문화부 안에 민중당을 전담하는 혁신정당지도과도 새로 만들었다. 내가 1차 남파됐을 때 포섭했던 사람도 민중당의 주요 당직자였다. 그러나 민중당이 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면서 해산됐고 혁신정당지도과도 없어졌다.”

―북한이 정당을 포섭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목적은 단 하나다.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거다. 한 번에 혁명하기는 힘들어진 거 아니냐. 북한 표현대로라면 혁명세력을 보전, 보호, 축적, 확대하는 게 일단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회에 진출하는 것이 아주 유용하다.”

―대남공작과에서 남파한 공작원이 몇 명이나 되나.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0여 개의 팀이 남한을 다녀갔다. 1개 팀을 제외한 나머지는 2명이 1개 팀이니까 20명 정도가 다녀갔고 남한에서 붙잡힌 경우는 없었다.”

―남한에 두 번 내려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두 번 모두 남한 인사를 포섭하기 위해서다. 첫 번째는 3명을 접촉해 2명을 포섭했고, 두 번째 왔을 때는 7명을 접촉했으나 한 명도 포섭에 성공하지 못했다.”

―포섭을 할 때 어떻게 접촉하나.

“북한에서 내려올 때 포섭 대상을 정해서 내려온다. 주로 통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의 주축 세력들이다. ‘북한에서 내려왔다’고 처음부터 터놓고 말한다. 포섭은 철저히 이념과 사상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지 돈으로 매수하지는 않는다. 노동당에 가입한 뒤 노동당의 지령을 받는 연락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포섭이라고 칭한다.”

―두 번 다 제주도로 침투했는데….

“제주도는 경비가 취약해 침투하기에 손쉬운 루트다. 북한이 제주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것도 중요한 침투 루트가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혁당을 만든 김영환 씨는 북한에서 김일성도 만났다. 그 외에 북한을 다녀간 남한 지하세력이 있었나.

“1990년대 초에만 김영환 외에도 두세 차례 남한 인사들이 비공개로 북한을 다녀간 것으로 알고 있다. 김일성을 만날 정도면 김영환은 남한에서 포섭한 인물 중 최고위급이라고 보면 된다. 1995년 김영환이 기고를 통해 북한체제를 비판했을 때 사회문화부 부부장이 굉장히 화를 내며 ‘변절한 놈’이라고 욕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北로켓#남파공작원#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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