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日 도쿄도 위탁 양육 프로그램 참가 강기두 목사 부부의 ‘국경 넘은 자식사랑’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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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엄마는 출산 7일 만에 인형만 남기고 사라졌다
쇼지가 또 사고를 쳤다… “고멘나사이, 고멘나사이…”

강기두 목사(오른쪽)와 아내 천행화 씨가 스즈키 쇼지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강 목사 부부의 꿈은 훗날 쇼지가 이 집에서 자란 것을 행운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강기두 목사(오른쪽)와 아내 천행화 씨가 스즈키 쇼지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강 목사 부부의 꿈은 훗날 쇼지가 이 집에서 자란 것을 행운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 “따르릉….” 2009년 가을. 오후 5시가 되자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를 들자마자 다짜고짜 내지르는 남자의 고함소리. “도대체 뭐하는 부모요. 내가 애 키우는 법 알려줄 테니 당장 우리 집으로 오시오.” 사고뭉치 아들 스즈키 쇼지(鈴木庄司·가명)는 초등학교 1학년. 이날도 같은 반 여자친구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었다고 했다. 상태가 심한지 수화기 너머 여자아이의 아빠는 흥분해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보이지도 않는 상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고멘나사이.” 매일같이 겪는 일인데 그날따라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잠시 동안이라도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
#만남

강기두 목사(52)와 아내 천행화 씨(47)가 일본 도쿄(東京) 시내 한 아동보호시설을 찾은 것은 7년 전인 2005년 어린이날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2년 9개월 된 남자 아이가 마룻바닥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사진으로 봤던 쇼지였다. 5월이지만 아직 바닥은 차가울 텐데…. 천 씨가 아이를 안았다.

잠시 후 깨어난 아이에게 “이름이 뭐야?” “몇 살이야?”라고 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한 번도 그렇게 물어본 사람이 없었을 거예요.” 담당직원이 말했다. 쇼지는 태어난 지 7일 만에 병원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엄마는 작은 인형 하나만 곁에 남겨두고 사라졌다.

쇼지를 두 번째 만난 날은 함께 외출해 친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세 번째 만났을 때는 집으로 데려왔다. 밤이 돼 재우려 했지만 침대를 무서워했다. 새벽녘이 돼서야 베개를 가슴에 껴안고 몸을 웅크린 채 거실 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이튿날 보호시설로 함께 돌아갔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자 “그럼 바로 데리고 가라”고 했다. 파격적인 조치였다. 보통은 아이가 사토오야(里親·위탁양육 부모)와 친해질 때까지 조금씩 만나는 시간을 늘리면서 몇 개월이고 관찰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영문을 몰랐다. 쇼지에게 “우리가 엄마 아빠란다. 이제부터 같이 살자”고 하자 아이가 처음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게 데리러 왔어….” 쇼지는 조금 더 기다리면 엄마 아빠가 데리러 온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1988년 일본에 정착한 강 목사 부부는 슬하에 이미 1남 2녀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토오야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로 한 것은 종교적인 신념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TV 프로그램 등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힘이 닿는 한 한 명이라도 따뜻한 가정에서 자랄 기회를 주고 싶었다. 아이들도 대찬성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막내딸이 제일 반겼다. 결심이 서자 도쿄 도의 사토오야 프로그램 문을 두드렸다. 일본에는 한국인 사토고(里子·위탁양육 자녀)도 적지 않다. 강 목사 부부는 일본 어린이를 선택해 한국인 사토고를 키우는 일본인들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한국인 부모와 일본인 아들 사이의 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시련

쇼지를 데려온 뒤 1년간은 집에서만 키웠다.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하던 쇼지는 새벽녘이 돼서야 지쳐 잠이 들었다. 자동차와 자전거도 무서워했다. 좀처럼 울지 않는 아이가 자전거 뒤에만 태우면 울었다. 먹을 게 보이면 토할 때까지 먹으려 했다. 보호시설에서는 정해진 시간에만 밥이 나오니 최대한 먹어두는 게 습관이 된 듯했다. 한번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고는 내 얼굴은 왜 없냐고 물었다. 부랴부랴 가족사진을 다시 찍어 걸었다. 다행히 쇼지는 빠른 속도로 가족의 일원이 되어 갔다. 주변의 일본 지인들도 아이 옷을 선물하면서 격려를 잊지 않았다.

강 목사 부부의 평온했던 삶이 뒤집힌 것은 1년 뒤 쇼지를 유치원에 보내면서부터였다. 쇼지는 매일같이 여자애들을 꼬집고 할퀴고 깨무는 사고를 쳤다. 쏟아지는 부모들의 항의에 천 씨는 파김치가 됐다. 뒤늦게 알고 보니 쇼지의 악행은 아동보호시설에서도 유명했었다. 매뉴얼을 중시하는 일본에서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서둘러 쇼지를 내준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그럴수록 쇼지를 감쌌다. 사랑으로 감싸주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쇼지의 사고 수위는 갈수록 높아졌다. 다른 부모들의 항의를 견디다 못해 유치원을 두 번이나 옮겨야 했다.

초등학생이 돼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는 책상 위를 걸어 다니기 일쑤였다. 방과 후가 되면 매일같이 걸려오는 같은 반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를 견뎌내야 했다. “쇼지 때문에 학교에 평화가 없으니, 상태가 호전될 때까지 보내지 말라”는 전화도 있었다. 담임선생은 급기야 쇼지가 움직이지 못하게 업고 수업을 하기도 했다.

하루는 강 목사가 쇼지의 버릇을 고쳐보겠다고 허벅지를 꼬집었다. 다른 사람도 꼬집히면 이렇게 아프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하필 다음 날이 도쿄 도에서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위탁아동 면담일이었다. 쇼지가 “아빠가 꼬집었다”며 멍 자국을 보이는 바람에 하마터면 아동학대라는 오해를 살 뻔했다.

#사랑


도쿄 도에서는 미안해하며 아이를 보호시설로 돌려보내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기른 정을 거둘 수 없었다. 마침 주변에 아동상담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국인 지인이 있었다. 아이를 보이자 심각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라는 진단을 내렸다. 쇼지를 데리고 병원을 찾자 우려대로 마찬가지 결과가 나왔다.

약물치료를 병행하면서 쇼지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됐다.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도쿄 도 히노(日野) 시로 이사한 뒤에는 처음으로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엄마 아빠를 깜짝 놀라게 했다. 새로운 동네에서는 쇼지에 대한 편견도 없었다. 쇼지의 표정도 부쩍 밝아졌다. 엄마가 담근 김치를 먹으며 “우리 엄마가 만든 음식이 제일 맛있어. 다른 애들은 이런 거 못 먹어볼걸” 하면서 치켜세울 줄도 알게 됐다. 요즘은 아빠와 함께 목욕탕에 가는 걸 제일 좋아한다. 강 목사 부부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됐다.

그렇다고 모든 고민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아이가 커 가면서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아빠와 쇼지의 성이 다르고, 국적도 다르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이상하게 본다는 것을 아이가 눈치채기 시작했다. 세상에 사토고가 쇼지 혼자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 한번은 지역 아동상담소에서 주최하는 사토고 캠프에 아이를 보냈다. 캠프에서 돌아온 뒤 쇼지가 강 목사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물었다. “아빠, 내 진짜 엄마는 죽었어?” 캠프에서 사토고 형들이 진짜 엄마는 어디 있느냐고 물어서 없다고 대답했더니 그렇게 얘기했다는 것이다. 사토고들은 보통 친부모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례가 많다. 강 목사는 그날 쇼지를 목욕탕에 데려갔다. 몸을 씻기면서 “쇼지가 훌륭한 사람이 되면 친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해줬다.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토오야로서 부모 자녀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도 고민이다. 한번은 강 목사 부부가 급하게 한국을 다녀와야 했다. 그럴 땐 사토고를 잠깐 다른 사토오야에게 맡기는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지역아동상담소의 일처리가 늦어 아이가 방치될 위기에 처했다. 강 목사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그러자 도쿄 도 직원에게서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너무 흥분하지 말라. 쇼지는 절대 당신의 자녀가 아니다. 잠시 맡았을 뿐이다. 자기 아이처럼 생각하고 키우려 하지 말라. 자식처럼 키우려 하면 힘들어 아이에게 화를 내게 된다. 아이는 자기가 혼난 이유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야단맞았던 것만 머릿속에 남는다. 어른이 되어서 사토오야를 원망하게 된다. 열심히 하지만 역효과만 생긴다.”

요지는 고교를 졸업하는 18세까지만 큰 탈 없이 지내도록 맡아만 달라는 것이다. 또 자기 아이처럼 키웠다가는 아이가 18세 이후로도 독립하지 못하면 사토오야에게 오히려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문이었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게 한국의 부모가 아니던가.

일본에서 한국인 부모가 일본인 자녀를 양육한다는 사실도 생각하기에 따라 여간 민감한 상황이 아니다. 주변의 시선도 문제지만 행여나 아이를 위해 매라도 들면 엉뚱한 파장이 생길 수 있다. 쇼지가 커가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미지수다. 특히 사춘기를 겪으면서 어떤 변화를 보일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소망

그래도 강 목사 부부는 쇼지가 있어 행복하다. 쇼지도 집안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엄마 옆에 붙어 앉아 뜻도 잘 모르는 한국 드라마를 보다 “한창 재미있을 만하니 끝났네” 하고 애늙은이 같은 말을 던져 주위를 웃음바다로 만든다. TV에서 축구 중계라도 하면 ‘대∼한민국’ 구호를 빼놓지 않는다. 요즘은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를 배워 한국어와 일본어로 번갈아 부르며 집안을 돌아다닌다.

강 목사는 쇼지를 통해 인간에 대한 새로운 배움도 얻고 있다. 사토오야 교육 프로그램은 사토고가 자기가 낳은 자식과 비슷할 것이라는 선입관을 갖고 기르려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은 다르며 그 다름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을 때 인간에 대한 존중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먼 훗날 쇼지가 청년이 돼 사토오야 프로그램에서 독립하는 날, 무슨 말을 할까. “이 집에서 날 길러줘 행운이었다”라고 말해준다면…. 강 목사 부부의 유일한 소망이다.

도쿄=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 사토오야(里親)제도 ::


일본 도쿄 도에는 부모가 있는데도 여러 사정으로 가정에서 자랄 수 없는 아이가 약 4000명이 있다. 이런 아이들을 맡아 고교를 졸업하는 만 18세까지 양육하는 부모를 사토오야, 아이를 사토코(里子)라고 한다. 부모와 자식 중 어느 한쪽이 중간에 포기하면 그 관계는 즉각 해제되며 법률적으로 부모자식 관계가 성립되는 입양제도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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