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대 김동진 씨 논문 “조선시대 호랑이 잡던 사냥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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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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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위기 땐 최정예 부대원으로”

호랑이사냥꾼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1745∼1821)의 ‘수렵도(狩獵圖)’.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호랑이사냥꾼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1745∼1821)의 ‘수렵도(狩獵圖)’.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옛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사냥꾼은 동물을 사냥하며 생계를 잇는 포수의 모습으로만 그려진다. 하지만 이들 사냥꾼은 조선시대 국난(國難)이 발생했을 때 전투의 최선봉에서 싸운 정부 산하 최정예 대원들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강사 김동진 씨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19세기 한국 호랑이를 바라보는 세 시각: 호랑이, 조선인, 서구인의 눈으로 그린 모습’을 28일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와 문화사학회가 주최하는 ‘문화네트워크: 불통(不通), 상통(相通), 개통(改通)’ 학술대회에서 발표한다.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대인 착호군(捉虎軍)은 조선 건국 초부터 중앙과 지방에서 포호(捕虎)정책을 수행했다. 착호군은 현종 15년(1674년) 때 5000명, 숙종 22년(1696년)에는 1만1000명까지 늘어났다. 17세기 들어 산의 외진 곳까지 개간하며 생활한 화전민이 늘어나고 수렵이 활성화되자 갈 곳을 잃은 호랑이들이 민가의 가축이나 인명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착호군이 국가 위기 상황에서는 전투에 나서 탁월한 전과를 올렸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전시에 소집될 의무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과는 특히 19세기 제국주의 열강과의 싸움에서 두드러졌다.

19세기 미국의 동양학자인 윌리엄 그리피스는 조선의 착호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서구의 근대적인 함선과 총포로 무장한 군대를 물리쳤다고 ‘한국, 은둔의 국가’(1907년)에 상세히 기술했다.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에 맞선 주력은 관동과 경기지방에서 모인 포수 370여 명이었다.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포수를 중심으로 한 별초군 3060명이 상경해 미군에 대항했고 고종 13년(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는 포수 4818명이 상경해 대응하기도 했다.

착호군의 위상은 개항 이후에도 상당 기간 유지됐다는 게 김 씨의 분석이다. 갑신정변 이후 흥선대원군이 새로 단장한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할 때도 범사냥꾼들은 행렬 맨 앞에서 화승총과 갑주로 중무장하고 기수단을 호위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한반도에서 호랑이 개체 수가 급감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대다수 범사냥꾼은 만주로 이동해 의병활동에 가담하게 된다. 김 씨는 “청산리전투에서 전과를 올린 홍범도 장군도 착호군 출신이었다”며 “일부에서는 호랑이사냥꾼을 단순히 생계형 포수나 취미로 사냥을 하는 사람들로 인식해왔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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