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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현대정치인이 된 중세의 절대악

입력 2011-05-24 03:00업데이트 2011-05-2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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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연극 ‘리처드 3세’
연출★★★★ 연기★★★★ 무대★★★☆ 자막★★☆
셰익스피어 원작의 ‘리처드3세’를 지극히 현대적인 정치극으로 재탄생시킨 루마니아의 클루지 헝가리안 시어터의 공연. 왕관을 쓴 배우가 리처드3세역의 졸트 보그단. LG아트센터 제공
셰익스피어가 그린 리처드3세는 악의 화신이다. 희대의 악당이 타이틀 롤을 맡는다는 유사성 때문에 흔히 맥베스와 비견된다. 맥베스는 전쟁영웅이었다가 주화입마(走禍入魔)한 악당이 된다는 점에서 ‘스타워즈’의 악당 다스베이더의 원형이다. 리처드3세는 기형적 외모로 “사랑받을 수 없다면 차라리 악당이 되리라”고 작정한 점에서 ‘배트맨’의 악당 조커의 원조다.

죄질만 놓고 봤을 때 리처드3세는 맥베스를 능가한다. 맥베스에다 부귀권력을 위해 아비와 형까지 죽이려 한 ‘리어왕’의 패륜아 에드먼드와 질투와 모략의 화신인 ‘오셀로’의 이아고까지 합쳐놓은 키메라 같은 악당이다.

그는 실존했던 영국 왕(재위 1483∼1485년)이었다. 셰익스피어 시대 영국을 다스렸던 튜더 왕조의 개조(開祖) 헨리7세가 그를 처단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와 함께 영국 왕위를 놓고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에 30년간 벌어진 장미전쟁이 종식됐다. 셰익스피어가 내전의 혼란상을 고발하는 한편 튜더 왕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기 위해 리처드3세를 절대악으로 그렸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렇게 그려진 리처드3세는 형제와 어린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조선의 세조와 그 손자로 온갖 패륜 끝에 왕위에서 축출된 연산군을 합쳐놓은 듯한 폭군이다. 하지만 수많은 배우들이 희대의 악당이란 점만으로 리처드3세 역에 매료된 것이 아니다. 리처드3세는 자신이 저지르거나 저지를 악행을 스스로 냉소하고 비판하는 강렬한 자의식을 지닌 악당이다. 심지어 자신의 파멸까지 정확히 예측한다.

루마니아의 클루지 헝가리안 시어터가 서울 공연에 앞서 21, 22일 대전예술의전당에서 첫선을 보인 ‘리처드 3세’는 이렇게 자의식 강한 악당을 현대적 정치인으로 소환한다. 시대적 배경은 15세기 영국이 분명하지만 등장인물들은 엘리베이터와 휴대전화, 캠코더, 패션쇼에 익숙한 21세기 현대인들이다.

리처드3세도 중세 권모술수에 능한 권력자가 아니다. TV 토크쇼에 출연해 대중에게 자신의 조카가 사생아라는 마타도어(흑색선전)와 자신이 사심 없는 정치인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펼치는 지극히 현대적인 정치인이다. 자신의 볼품없는 외모조차도 동정심을 유발하는 이미지 정치에 활용한다.

연출가 가보 톰파는 셰익스피어가 리처드3세를 묘사할 때 사용한 ‘거미’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흉측한 외모나 흑심 때문이 아니다. 권력 주변부 인사들의 어둡고 축축한 욕망에 거미줄을 쳐놓고 걸려드는 자들을 자신의 먹잇감으로 삼는 귀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욕설과 저주의 이면에 숨겨진 그들의 좌절된 욕망을 꿰뚫어본다. 자기 손으로 그 아비와 남편을 살해한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삼을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녀가 쏟아놓은 저주 뒤에 감춰진 “사랑받고 싶다”는 내밀한 욕망을 간파해서다.

이런 통찰은 고스란히 현대정치에 투영된다. 현대의 기형적 정치인들이야말로 대중의 음습한 욕망의 산물이다. 그들은 그 대중적 욕망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꿰뚫어보고 그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욕망의 거미줄을 치고 기다리는 이들이다.

그들의 한계는 그 주변에 먹잇감이 사라지는 순간 찾아든다. 리처드3세의 위기 역시 모든 정적을 해치우고 왕좌에 오르면서 그가 갖고 놀 먹잇감들이 숨거나 도망가 버렸기 때문이다. 무서운 점은 리처드3세의 후예들 역시 이를 알고 양지에서 ‘킹’이 되기보다는 ‘킹 메이커’로서 암약하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톰파의 통찰은 거기에까진 미치지 못했다. 그 대신 기독교성경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를 에필로그로 추가함으로써 리처드3세의 현대적 도래를 불길한 목소리로 암시한다.

클루지 헝가리안 시어터는 한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다가 루마니아 영토로 편입된 트란실바니아 지역을 대표하는 극단으로서 헝가리어로 공연을 펼친다. 배우들의 발성이 좋아 대극장 공연에서도 마치 마이크를 쓴 것처럼 대사가 명징하게 들린다. 대극장 연기 경험이 일천한 한국 배우들이 감상해볼 만하다. 특히 리처드3세 역(졸트 보그단)의 마력 가득한 연기가 일품이다. 왕세자를 웨일스 왕자로, 성 바울을 성인 폴 식으로 직역한 한글자막 번역은 아쉬웠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6∼28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 3만∼7만 원. 02-200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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