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 구경선 씨의 일러스트레이터 성공기

동아일보 입력 2011-04-20 03:00수정 2011-04-20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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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만으로 통하는 가상세계… 차별없는 소통 덕에 일어섰죠”
듣지 못해도 괜찮았다. 글과 그림으로 대화를 나누는 인터넷 세상에서 청각장애인 구경선 씨의 장애는 사라졌다. 사진은 구 씨와 그가 만든 토끼 캐릭터 ‘베니’. 싸이월드 제공
두 살 때 열이 펄펄 끓었다. 열병을 앓고 나니 귀가 들리지 않았다. 듣지 못하니 말도 못 배웠다. 구경선. 그녀가 8세 때 초등학교는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사정사정해 간신히 다른 학교를 다녔지만 시선은 곱지 않았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친구 빚보증까지 잘못 선 뒤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결국 18세 때 고등학교를 중퇴한 구 씨는 네일아트 기술을 배워 미용실에 취직했다. 한 달 만에 쫓겨났다. “제가 듣지 못하니까 동료들이 불편해 했어요. 원망스럽지만 이해도 가요.” 그리고 21세까지 하릴없이 온라인게임에 빠져 3년을 보냈다. 게임 속 그녀는 가상의 동료를 이끄는 ‘길드 마스터’였지만 현실에선 ‘백수’일 뿐이었다. 세상은 차가웠다.

하지만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특수 발음 훈련을 시키고 입 모양 읽는 법을 가르치며 일반 학교에 다니도록 도왔다. 그녀를 거부하는 초등학교를 모두 찾아가 애원해 기어이 입학시킨 것도 어머니였다. ‘미안하다’며 집을 나간 아버지는 매달 생활비를 보내왔다. 그래도 그녀는 게임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왔다. 위암 말기였다. 그가 가족과 보낸 시간은 고작 석 달. 어머니, 아홉 살 어린 남동생과 쓸쓸한 빈소를 지키면서 “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하고 2년 반을 공부한 뒤에야 졸업장을 얻었다. 그래도 갈 곳은 없었다. 마음은 바뀌었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2007년 6월, 그녀는 싸이월드를 시작했다. 한 친구가 “‘스킨숍’이란 걸 하면 그림을 그려 돈을 벌 수 있다”고 알려줬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배경화면을 장식하는 그림을 그려 파는 일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부업으로 많이 한다고 했다. 25세. 친구들은 사회생활에 열심이었지만 그녀는 한 푼도 스스로 벌어본 적이 없었다. 중퇴 전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를 다녔던 그녀는 그림은 잘 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9개월 동안 싸이월드의 심사에서 매번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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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드디어 ‘구작가’라는 이름으로 스킨숍을 열었지만 사람들은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모든 게 귀찮아졌다. 한 해가 지났다. “1년간 겨우 20만 원 벌었어요. 싸이월드에 내는 수수료까지 포함해서요. 마침 봄이었고, 날은 따뜻했고,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죠.”

2009년 4월, 그래서 ‘다 귀찮아’라는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몰랐다. 그 그림이 모든 걸 바꿨다. 토끼 한 마리가 파란 배경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잔디밭’ 같은 느낌이지만 잔디밭이 아니라 그냥 연두색 단색 배경이었다. 정말 귀찮아서 그렇게 그린 건데 사람들이 열광했다. 봄볕 따뜻한 4월의 오후, 모두의 느낌이 딱 그 토끼 같았던 것이다. 그날 하루, ‘다 귀찮아’ 스킨(작은 사진)은 80만 원어치가 팔렸다. 1년여 동안 판매한 스킨의 네 배가 넘었다. 구 씨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림으로 대화한다는 게 어떤 뜻인지 이날 처음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구경선에서 ‘구작가’(구 씨의 필명)가 됐다.

이후 그녀는 지난해 하반기에만 16만 건의 스킨을 팔아 싸이월드가 뽑는 ‘스킨숍 베스트3’에 올랐다. 싸이월드에서 스킨이 유명해지자 다른 일거리도 생겼다. 인터넷업체는 웹 디자인을 해달라고 의뢰했고, 구작가의 분신 같은 토끼 캐릭터 ‘베니’를 이용해 그림동화를 출판하자는 제의까지 받았다. 구 씨는 “말하고 듣지는 못해도 싸이월드에선 글과 그림만으로 대화가 가능했다”며 “의사소통에 문제가 사라지니 차별도 사라지더라”고 했다.

이 모든 인터뷰는 100% 메신저로 이뤄졌다. 인터뷰 내내 그녀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가 직접 “고양이를 키우는데 우리 고양이가 꼭 제 눈앞에 와서 ‘야옹∼’이라고 울어요. 제가 못 들으니까요”라는 얘기를 할 때 외에는. 추가 질문이 필요할 때에 대비해 그녀에게 ‘메신저에 늘 접속해 있느냐’고 물었다. 답이 돌아왔다. “아이폰 쓰거든요. 010-××××-××××로 문자메시지를 보내세요. 바로 답변 드릴게요.” 장애를 넘은 건 첨단기술이 아니라 메신저와 싸이월드, 스마트폰 같은 너무 일상적이라 당연하게 느껴지는 기술들이었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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