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까지 식지 않는 ‘1Q84’ 열풍의 실체는…평론가 2인 지상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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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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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판타지에 순애보까지 독자의 필요 넘치게 채워
삶의 대안 구했던 독자에겐 명성에 걸맞은 대답 없어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 ‘1Q84’ 열풍이 뜨겁다. 국내 최대 서점 교보문고는 예약판매만으로 3만여 부가 나간 ‘1Q84’ 3권이 7월 28일∼8월 3일, 온·오프라인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 집계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5일 밝혔다. 책은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도 7월 26일부터 줄곧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1Q84 3권은 지금까지 20만 부가 제작됐고 초판은 10만 부 전량이 판매됐다”고 밝혔다. 총 115만 부가 제작된 1, 2권도 증쇄에 돌입했다. 하지만 평단의 평가는 엇갈린다.“신선함이 떨어지고 메시지도 부족하다” “재미와 함께 철학적 사유를 곁들였다”는 비판론과 옹호론이 맞선다.김춘미 전 고려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와 방민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1Q84’에 대해 지상 논쟁을 펼쳤다》
김춘미 前고려대 일어일문학과 교수


본 문학평론가 시미즈 요시노리(淸水良典)는 올해 “2009년은 문학이라는 범주를 넘어 미디어 전체를 뒤흔든 ‘1Q84’의 해였다”고 평가했다. 일본 내에서도 비방과 칭찬으로 극명하게 평가가 나뉘는 하루키이지만 2006년의 프란츠 카프카상과 2009년의 예루살렘상 수상,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몇 년째 거론되는 등 ‘일본을 대표하는 국제적 작가’라는 평가로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는 것도 사실이다.

‘1Q84’는 SF소설로 자리매김되기도 한다. 암살자 이야기니까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고, 리틀 피플이라는 요정이 나오니까 판타지라고도 할 수 있으며, 초능력자가 나오니까 전기(傳奇)라고 할 수도 있다.(일본 평론가 오모리 노조미, ‘무라카미 하루키 1Q84를 어떻게 읽나’) 다양한 신흥종교단체와 가정 내 폭력 등의 사회적 이슈가 등장하는가 하면 NHK 라디오 수금원의 아들과 증인회의 착실한 신도의 딸이라는 조촐한 계층의 일상생활이 존재하고 이 둘의 일편단심 순애보가 바탕에 깔려있어 독자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

따라서 이 소설은 순애보적인 순정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직 초경이 없는 17세짜리 소녀(후카에리)와 서른이 된 남자주인공(덴고)이 섹스를 거리낌 없이 나누는가 하면 마음은 일편단심 덴고에게 주지만 섹스가 그리워지면 모르는 남자와 광란의 성 향연을 벌이는 여주인공(아오마메)이 그려져 있으므로 선정적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정 내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을 감쪽같이 제거하는 여성 살인청부업자이기도 한 아오마메는 영화 ‘솔트’의 앤젤리나 졸리를 연상시키는 멋지고 쿨한 여전투사이다.

풍성한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글읽기의 재미 증폭시켜

작품의 특색을 나열하다 보니까 작가가 독자가 원하는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충분 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 눈에 띈다. 게다가 그것이 하루키 특유의 유머를 곁들인 가독성 좋은 매끄럽고도 세련된 문장으로―다소의 멋진 철학적 사유를 곁들여 그려져 있으니 독자가 열광하는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한다.

이 모든 요소가 독서의 재미와 즐거움을 증폭시킨다. 일본 평론가 가토 노리히로(加藤典洋)는 ‘노골적인 엔터테인먼트성은 왜 도입되었는가?’란 글에서 일본 TV에 등장하는 약자를 대신하여 악을 응징하는 정의의 투사의 활용과 애니메이션적 요소가 혼합된 대규모의 엔터테인먼트성 도입이 오히려 ‘1Q84’에 순문학적이라고 할 깊이를 주고 있다고 정리하고 있다. 이런 엔터테인먼트성은 나카무라 후미노리(中村文則)의 ‘소매치기’, 이케자와 나쓰키(池澤夏樹)의 ‘가에데’, 히라노 게이이치로(平野啓一郞)의 ‘던(dawn)’(이상 2009년) 등에도 두드러지는 현상이며 일본문학의 하나의 흐름으로 정착될 것으로 보인다. 하루키가 시대와 독자의 요구를 정확히 읽는 작가로 존속하는 한 그는 계속 환영받는 작가로 남을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진 제공 엘레나 시버트 씨
사진 제공 엘레나 시버트 씨
미 ‘세계문학’이 된 하루키라는 문학 상표, 이 작품을 출판한 ‘빅브러더’의 힘, 삶의 대안이 필요한 시기에 지극히 무기력한 한국의 작가들, 세계문학의 고전을 활용할 줄 아는 작가의 능력, 독자의 시선을 잡는 추리소설 기법, 현실 문제의 복잡다단함을 파헤치고 삶과 죽음의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는 하루키 스타일 등등….

그런데 여기에 한국 독자가 하루키를 즐겨 읽는 이유를 하나 추가할 수 있다. 일본에서 하루키의 출현이 서구와 일본을 휩쓴 68혁명의 좌절과 연관이 있듯이 한국에서 하루키가 ‘노르웨이의 숲’으로 등장한 때도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종말의 감각이 주조를 이룬 시기였다. 지금 독자가 ‘1Q84’를 찾는 이유도 이 연장선에 있다.

하루키 독자에게 ‘1Q84’는 삶의 대안이자 문학적 대안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1984’년이자 ‘1Q84’년이다. 대낮도 한밤처럼 어둡고 큰 길도 수렁처럼 발이 빠져들지 않던가. 우리는 무엇이든 붙잡아야 하는데, 기존의 언어는 오염되고 타락했다.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매혹하거나 감동시키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구원’을 갈구한다. 기존 개념이 오염되고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구원은 새로운 언어, 인공적이고 가상적인 언어로 제시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 출판계에서 ‘1Q84’의 가치는 대안적 구원의 언어가 가진 깊이와 새로움의 문제로 압축된다.

장식적 요소들에 기대어 상상력 고갈 메우려는 듯 보여

이에 대해 필자는 하루키의 명성이나 ‘1Q84’에 대한 독자의 열광에 비해 그가 제시하는 대안이 그다지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본래 하루키는 고독과 고립의 형상을 창조하는 데 능숙한 작가다. 그는 ‘덴고’와 ‘아오마메’라는 고독한 키덜트(어른이자 아이)를 보여준다. 그들은 각각 TV 수신료를 구걸하는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으며 ‘증인회’라는 독단적 종교의 위압 아래 놓여 있다. 소년, 소녀는 물론 종교와 정보 메커니즘의 불합리, 독단을 상징한다. 이 구조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야기가 3권까지 진행된 상태이므로 끝을 알 수 없다. 그러나 3권은 그가 1권에서 펼쳐놓은 ‘선구’나 ‘여명’ 같은 은밀한 종교집단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파헤치는 대신 추리소설적인 기법 등 여러 장식적 요소들에 기대어 상상력의 고갈을 보충하려는 위태로움이 느껴진다. 현대인의 고독과 고립이라는 문제도 한국 독자들이 깊이 공감할 만큼 보편화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NHK 수신료 문제가 일본에서 종종 이슈가 되는 것은 맞지만 이것이 작가가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릴 만큼 심각한 ‘미시사’일까.

좋든 싫든 하루키 문학은 이미 ‘세계문학’이 됐고,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샀기 때문에 ‘1Q84’에 대한 판단은 이 작품의 장점 여부와 같이 단순할 수는 없다. 이 작품이 좀 더 엄격하고 냉정한 평가를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필자의 판단은 ‘글쎄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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