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갇힌 대한민국]재산 1호가 평생족쇄로… 20, 30대 절반 “그냥 전세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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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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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을 접은 2030
“청약저축 생각조차 안해
그 돈으로 지금 풍족하게”

■ 악몽 꾸는 4050
“자산 85% 부동산에 묶여
싫지만 주택연금 밖에…”

■ 주름 느는 사회
집도 못파는 세상 한탄
심각한 후유증 낳을 우려

경기 고양시에 사는 김모 씨(71)는 지난해 9월부터 주택연금에 가입할 생각을 했다. 마땅한 수입원이 없는 탓에 통장 잔액이 바닥이 나 손자들 용돈 줄 형편도 안 됐기 때문. 김 씨는 차일피일 미루다 올해 4월에야 주택연금에 가입했다. 김 씨가 집을 담보로 매달 받는 주택연금은 169만 원. 작년 9월에 가입했더라면 175만 원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사이에 집값이 4000만 원 떨어지는 바람에 연금액이 줄었다. 김 씨는 “내 집에 대한 애착 때문에 망설이다 손해를 봤다”며 씁쓸해했다.

미로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는 부동산 시장이 한국 사회의 풍속도까지 바꾸고 있다. 젊은층은 ‘내 집’이라는 명분보다 ‘렌털 하우스’의 실속에 더 기울고, 노년층은 평생 벌어 장만한 집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보다 못해 서둘러 주택연금을 신청하고 있다. 실수요자들은 중후장대(重厚長大)형 대형 주택을 보유하는 데 따른 부담이 커지자 중소형 아파트로 눈길을 돌리는 추세다.

○ 퇴색하는 ‘내집 마련’ 신화

한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대리(34)는 “요즘처럼 집값이 떨어진다면 내 집 마련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집을 장만하기 위한 청약저축 등은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전세나 월세에 살면서 여유 있게 지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 대리 같은 젊은층 사이에는 ‘내 집 마련’에 집착하지 않는 분위기가 빠르게 퍼지고 있다. 부동산114가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사를 할 경우 자가(自家)가 아닌 전세를 선택하겠다’고 응답한 사람이 20대 52%, 30대 49%로 2명 중 1명꼴이었다. 열심히 돈을 모아 집을 사도 어차피 값이 떨어져 손해를 본다면 차라리 전세를 살면서 집값을 관망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미 집을 가진 일부 중장년층도 집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경기 성남시에 사는 주부 최모 씨(65)는 “예전에 집값이 안정되거나 오르던 시기에는 내 집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든든했는데 요즘은 가만히 있어도 재산이 줄어드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내 집을 가진 중장년층이 불안해하는 것은 전체 자산에서 집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가 최근 1955∼63년에 태어나 수도권에 거주하는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이 보유한 전체 자산의 85.3%가 부동산에 묶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인당 평균 자산 5억4000만 원에서 부동산이 4억5000만 원을 차지하는 것. 집과 부채 등을 빼고 나면 은퇴 후 생활자금으로 쓸 수 있는 현금은 7100만 원에 불과했다.

조혜진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일본과 미국도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기 시작한 1990년과 2007년 각각 주택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며 “국내에서도 부동산 가격 하락이 계속된다면 부동산에 치우친 자산구조 때문에 베이비붐 세대의 노후가 어려워질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앞으로 더는 집에 의지하지 못하게 된 노년층은 주택연금에 기대고 있다. 주택연금은 60세 이상 주택소유자가 금융회사에 집을 담보로 맡기고 그 대신 연금을 받는 제도. 한국주택금융공사에 따르면 6월 주택연금 신규 가입은 191건으로 2007년 7월 이 상품 시판 이후 월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 들어 6월까지는 모두 849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4% 증가했다. 주택연금 월 지급액은 현재 집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집값이 더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가입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주택금융공사 측은 설명했다.

○ 주택 실수요자 중소형 선호 뚜렷

최근 A건설사가 인천에서 분양한 1000여 채 규모의 아파트 중 115m² 이하 중소형 440여 채는 3순위 청약에서 모두 마감됐다. 반면 115m² 초과 중대형 560여 채는 아직 상당량이 미분양으로 남은 상태다. 이 아파트 85m²를 청약한 회사원 유모 씨(42)는 “요즘 전셋값이 너무 올라 작은 아파트를 장만했다”며 “오직 거주할 목적이지 시세차익을 노릴 생각은 없고 집값이 떨어져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전국적으로 미분양 아파트가 좀처럼 감소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중소형 아파트는 이처럼 청약경쟁률이 강세를 보이고 미분양 물량도 상대적으로 적다. 5월 말 현재 전국 미분양 아파트 11만458채 중 85m² 이하는 4만4832채로 85m² 초과 6만5626채보다 2만794채 적었다. 특히 60m² 이하 미분양 물량은 5048채에 지나지 않아 실수요자들이 중소형을 선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원갑 스피드뱅크 소장은 “중소형 아파트의 인기는 건설사들이 공급을 적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며 “건설사들이 소형 주택 공급을 늘리고 있고 앞으로 보금자리주택 등도 쏟아져 나오므로 가격이 안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6·2지방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한 원인 중 하나를 ‘거래 실종’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서울 은평구에서 문구점을 하는 이모 씨(47)는 사업을 하다 진 빚을 갚으려고 중개업소 7곳에 살던 집을 내놓았지만 결국 팔지 못했다. 이 씨는 “시세보다 터무니없이 낮게 가격을 정했는데도 팔리지 않아 친척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며 “빚도 제대로 갚지 못하게 하는 세상에 화가 나 지방선거에서 분풀이를 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잔액이 6월 말 현재 270조 원을 넘는 상황에서 부동산 거래가 마비되면 주택 가격이 하락하고 이는 또다시 매매를 위축시키는 악순환을 불러와 가계 및 금융 부실로 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거래 실종이 당장은 개인의 경제적 손실로 나타나지만 장기적으로는 심각한 사회적 후유증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지승연 인턴기자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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