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오신 선생님들은 청류(淸流)고, 이렇게 맨발에 슬리퍼 신고 다니는 저는 탁류(濁流) 중의 탁류가 아닐까 하는데요. 어떻게 저 바깥의 저잣거리가 돌아가고 있는지를 오늘 한번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일 오후 경기 성남시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의 한 강의실. 굵은 장맛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한중연의 교수 연구원 등 50여 명이 이날 연구전문직포럼에 참여하기 위해 모였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정장 차림이었지만 강단에 선 강연자는 티셔츠와 찢어진 청바지, 삭발한 머리, 뿔테 안경으로 뚜렷한 대조를 보였다. 광고기획사 TBWA코리아의 박웅현 전문임원(사진)이었다. 그는 ‘사람을 향합니다’ ‘생각이 에너지다’ ‘청바지와 넥타이는 평등하다’ 등 인기 광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칸 국제광고제의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박 임원이 준비해 온 파워포인트 자료를 화면에 띄우자 자두가 그려진 빨간색 바탕에 노란색 물음표가 떴다. “과연 아이디어는 어디에 살까요?”라는 질문을 던진 그는 “아이디어를 낼 때는 잘 모르지만 나중에 복기(復棋)해 보면 그때야 책, 그림, 음악 그리고 일상 속에 아이디어가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고 말했다.
“비발디는 저한테 씹다 버린 껌이었어요. 초등학교에서 배우고 사방에서 벨소리로 나오는 익숙하고 지겨운 음악이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비발디의 음악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지더군요.”
이 체험을 통해 그는 한 피로해소제 광고에 비발디의 ‘사계’를 배경음악으로 삽입하고 ‘××× 씨의 피로회복제는 상상력입니다’라는 카피를 내놨다. 2004년 프랑스 오르세미술관에서 본 앙리 루소의 ‘꿈’을 통해 얻은 영감은 2008년 이동통신 광고의 밑바탕이 됐다. 김화영 산문집 ‘바람을 담는 집’에서 읽은 폴 세잔의 말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는 한 정유회사 광고의 ‘생각이 에너지다’라는 카피로 바뀌었다.
박 임원이 이날 강연을 하게 된 것은 TBWA코리아와 한중연의 인연 덕분이다.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등의 책을 낸 박 임원에게 5월 말 한중연이 TBWA코리아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국학 대중화 프로그램 ‘미루(美樓)’를 열자고 제안했고, 이날 강의는 그 답례로 마련됐다. 2009년 시작한 ‘미루’ 프로그램은 한중연 내에서만 진행돼 왔으나 TBWA코리아에서 처음으로 외부에서 열렸다. 앞으로도 외부 강의의 폭을 넓힐 예정이다.
박 임원은 “우리 회사에서 열린 미루 프로그램에서 한형조 교수님이 퇴계가 ‘일상(日常)이 곧 성사(聖事)다’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를 봐도 그렇다. 그냥 말 타고 가는 평범한 일상인데 그걸 아름다운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았나? 아무것도 아닌 것에 잘 감동받는 분들이었다. 바로 그게 창의성”이라고 말했다.
그는 광고의 핵심을 ‘일상’이라고 말했다. 일상 속에서 누구나 공감할 만한 순간을 광고로 만들어야 마음을 끌 수 있으며 일상에서 특별한 것을 발견해낼 줄 아는 감성은 인문학을 통해 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문학은 수원지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쌓여있는 인문학이 아니면 아이디어를 어디서 찾겠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TBWA코리아에서 고미술사를 강의했고 이날 박 임원의 강연에도 청중으로 참석한 윤진영 한중연 국학자료연구실 연구원은 “TBWA코리아에 가서 강의를 할 때 직원들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옛 그림을 한 장 보여줄 때마다 ‘우와’ 소리가 나며 반응이 좋았다”며 “원래 TV를 거의 안 보는데 그날 이후 광고만 따로 챙겨본다. 30초라는 짧은 시간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보며 우리는 연구를 하며 그런 노력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박 임원은 인문학자와 사회의 소통을 강조하는 말로 강의를 마무리했다. “현대사회는 결핍이 결핍돼 있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을 제대로 느낄 수 없죠. 하지만 인문학을 접하고 나면 달라집니다. 인문학은 그 자체가 즐거움이고, 사람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여기 인문학 하시는 분들이 바깥과 소통을 많이 하시길 바라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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