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식량배급 포기… 장마당 전면허용”

20031013|주성하기자 입력 2010-06-15 03:00수정 2015-05-2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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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지원단체 “노동당, 지난달 26일 전지역에 지시”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가 지난달 26일 주민들에 대한 식량 공급을 포기하는 내용의 지시문을 사상 처음으로 전국에 하달했다고 대북지원단체 ‘좋은 벗들’이 14일 밝혔다. ‘현재 조선의 식량사정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이 지시문에는 ‘당분간 국가 차원의 식량해결이 어렵기 때문에 당, 내각, 국가보위부 등이 부문별로 자력갱생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지시문은 지난 몇 년간, 특히 지난해 말 화폐개혁 이후 급진적으로 추진하던 사회주의 경제체제 복원 시도의 실패를 자인하는 한편 시장을 전면 허용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지시문의 핵심은 당국이 장마당을 폐쇄하고 시장을 강력히 통제하려던 기존의 방침을 철회하고 시장을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것으로 입장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북한은 올 1월 장마당을 폐쇄했지만 화폐개혁 이후 사회가 큰 혼란에 빠지자 한 달도 안돼 암묵적으로 허용했다. 하지만 이번 지시문에서는 지금까지 장마당을 옥죄던 모든 규제를 과감하게 철폐했다. 장사도 24시간 허용되며 금지품목 제한도 없어진다. 2007년부터 강력하게 통제해 온 장마당 나이 제한(49세 이하)도 함께 풀렸다. 작년에 가장 먼저 폐쇄됐던 평성시장에는 “모든 규제를 취소하고 장사를 풀라”는 지시가 이미 하달됐고 함경북도 회령에서는 시당 책임비서가 직접 나서 그동안 축소시켰던 장마당 용지를 다시 확장하고 있다고 한다.

北 “국가차원 식량해결 안돼… 자력갱생하라”

‘사회주의 경제 실패’ 자인
장마당 24시간 전격 개방
개인 무역거래도 부활시켜

내부 통제는 강화
한 국행 탈북자 가족들
산골추방 ‘공포통치’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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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부에도 시장질서 유지 외에 어떠한 단속이나 부당한 요구를 하지 말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시장 활성화를 위해 올 1월 통폐합했던 무역회사들을 다시 살리기 위한 다양한 조치도 강구됐다. 주된 내용은 개인의 무역거래를 허용하며 무역 수익금의 일부를 개인이 합법적으로 갖는 것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불과 반년 전만 해도 개인의 무역거래를 형사처벌하던 것에서 완전히 바뀐 것이다. 중국에서의 수입을 증대해 장마당 가격을 안정화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같은 규제완화 조치와는 별도로 공안기관인 보위부와 보안부에는 전보다 더 가혹한 통제를 지시해 ‘공포통치’ 강도를 높였다. 특히 해외 탈북자와 통화하면 전체 가족을 감옥에 보내고 한국행 탈북자가 있는 가족은 깊은 산골로 추방해 사회와 아예 격리한다는 방침이다. 대규모 탈북이 재연될 가능성을 미연에 강력하게 막겠다는 의도다. 범죄 예방을 위해 길이 9cm 이상인 칼이나 톱 등은 모두 회수한다는 황당한 대책도 포함돼 있다.

북한의 이번 조치들은 지난 수년간 지속돼 온 장마당 억제정책의 실패를 당국 스스로 인정한 것이며 나아가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장마당’ 시장경제 앞에 항복 선언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 몇 년간은 시장통제 정책이 크게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몇 년 뒤면 북한주민들이 김정은 후계자 지명 소식을 직장이 아닌 장마당에서 접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북한은 지금껏 2012년까지 사회주의 경제시스템을 복원하고 후계구도도 마무리해 ‘강성대국’을 선포한다는 목표를 갖고 정책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이번 조치로 기존의 정책도 대수술이 불가피해 보인다.

지시문은 또 지금 북한 내부 사정이 얼마나 급박한지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 직후 식량공급 포기 선언이 나왔다는 점은 중국의 대규모 식량지원도 이뤄질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최근 북한 간부들의 식량대책 회의에서는 “외부에서 식량을 구하지 못하면 1990년대 중반과 같은 대량 아사를 피하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화폐개혁 실패로 인한 불만이 중견간부들에게까지 팽배해지자 북한 당국은 최후 방편으로 통제를 풀어주는 대신 알아서 먹고살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민심이 폭발할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차라리 정책을 후퇴시키는 편을 택한 것이다.

한편 ‘좋은 벗들’은 지금까지 그나마 배급을 조금씩 받던 간부들과 평양 시민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김영일 전 총리가 1월 말 “식량문제는 석 달만 기다려 달라”고 했던 발언과 최근 김 위원장의 방중에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다가 크게 낙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부 주민은 “정부가 조금만 참으면 해결된다고 항상 거짓말만 하다가 이제는 솔직히 고백하고 나름대로 대책안을 내놓은 것은 크게 달라진 태도”라며 긍정적인 평가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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