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제주 올레를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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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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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봉과 유채밭, 최재수, 그림 제공 포털아트
일출봉과 유채밭, 최재수, 그림 제공 포털아트
화창한 봄날, 제주 올레를 걸었습니다. 하늘과 바다와 대지와 사람이 아무런 격식 없이 절로 어우러지는 아름답고 푸른 길이었습니다. 걸으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걸으니 걸음과 생각의 구분이 없어져 심신이 절로 정화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자연을 벗 삼아 걷는 일의 매력이 어떤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보행의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걷는 일의 자연스러움은 우리에게 주어진 본능적 유전인자입니다.

올레뿐 아니라 요즘은 지방마다 옛길을 복원해 걷기 좋은 길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을 위시해 지방의 특색과 전통을 살리는 길이 많아지니 걷고 싶은 본능에 절로 마음이 설렙니다. 오직 길을 걷기 위해 먼 이국으로 날아가 트레킹을 하던 사람도 이제는 우리 삶의 토양 위에서 원 없이 걷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동에 가면 퇴계 이황 선생이 오가던 ‘녀던길(옛길)’이 있습니다.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50리 길 가운데 단천교와 가송리 사이의 3km 정도 되는 강변길입니다. 그 길을 수도 없이 오가며 퇴계 선생은 자신의 사유와 사상을 부화시켰습니다. 그 길을 지금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조상과 후손 사이의 시간적 정신적 교류를 의미합니다.

퇴계 선생뿐 아니라 인류사에 족적을 남긴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 산책로를 만들어 사유의 둘레길로 삼았습니다. 왼발과 오른발을 교대로 사용하는 보행은 마치 자전거 페달을 밟아 바퀴를 굴리는 이치처럼 자연스럽게 뇌의 회전을 활성화합니다. 생각이 막힐 때, 뭔가를 구상할 때 마음을 비우고 길을 걷노라면 자신이 골몰할 때 미처 떠올리지 못한 우주적 영감이 되살아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하루하루 살아가는 과정이 모두 길을 만드는 여정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길에 대한 경험입니다.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인생길입니다. 누구나 혼자 길을 가지만 그것이 모여 너와 나의 길을 만들고 우리 모두의 길을 조성합니다. 길에 대한 나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다른 사람의 길라잡이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도를 받기도 합니다. 이렇게 누적되어온 길에 대한 인류의 경험이 오늘날의 세계와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위해 우리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걸어왔는가, 곰곰 되새겨보아야 합니다. 나 하나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 모두 함께 가는 길의 바탕이 되고 있는가, 다른 사람이 만들어나가는 길과 견주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남이 걷고 싶은 길이 되게 만드는 일, 그것은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그 길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오직 인내와 절제를 통해서만 구현할 수 있는 길이니 걷고 또 걸으며 어느 하루도 자기 연마의 보행을 멈추지 말아야겠습니다. 인생, 누구나 길을 걸어 스스로 길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박상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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