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게 차 내주시던 ‘작은 스님’… 그땐 행복했습니다

동아일보 입력 2010-03-13 03:00수정 2010-03-13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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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기자 2명이 가까이서 본 법정 스님■ 20년 인연 간직한 오명철 기자본보 ‘산에는 꽃이 피네’ 칼럼5년간 원고 심부름… 소중한 추억이승 인연 다시 이어질 거라 믿어
2003년 7월 불일암에서 스님과 함께한 오명철 기자.
언젠가 스님과 이별하게 될 것이라고 짐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렇듯 현실이 되니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다. 2008년 초 스님이 폐암 진단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 나는 “왜. 산중 공기 좋은 곳에서 담배도 안 피우시고 일평생 지내신 스님에게 그런 몹쓸 병이…” 하며 신을 원망했다. 하지만 주변에 폐암을 이겨내신 분들의 사례를 알고 있기에 스님께서 능히 극복해 내실 수 있을 거라고 믿고 회복을 기도했다. 하지만 어제 길상사 행지실에서 영면해 계신 스님의 법구를 보면서 이생에서 스님과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났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더라도 언젠가 스님의 암자에서 스님과 함께 외우던 미당의 시구 한 구절을 떠올리면 스님과의 인연은 어떤 식으로든 다시 이어질 것만 같다. 스님께서는 평소 ‘나는 전생에 수도자였고, 내생에도 분명 수행자로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또 ‘큰스님’이 아니라 ‘작은 스님’이 되고 싶어 하셨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미당 서정주)

스님을 처음 만나 뵌 것은 20년 전인 1990년 8월 초였다. 문화부 기자로 전남 순천시 승주읍 송광사에서 매년 여름 일반인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출가 3박 4일’ 프로그램을 취재하러 내려간 길이었다. 당시 스님은 이 프로그램의 책임을 맡고 계셨다. 나는 솔직히 ‘취재’보다는 스님을 만나 ‘인터뷰’ 기사를 쓰게 되기를 고대했다. 스님이 언론과의 인터뷰를 아주 싫어하시고, 다정다감한 글과는 달리 매우 깐깐하시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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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1993년 4월∼1998년 11월 매달 한 차례 동아일보에 쓴 칼럼 ‘산에는 꽃이 피네’의 육필 원고.
수련생들이 오후 참선을 마치고 잠시 계곡 물에 발을 담근 사이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과 차 한잔 나누며 좋은 말씀을 듣고 싶어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라며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손사래를 치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신다. “그럼 차 한잔만 마시고 가겠습니다” 하며 물러섰더니 “오늘은 해가 떨어져서 곤란하니 큰절에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 내 암자로 올라오시오” 하며 여지를 주셨다. 스님께서 수행 질서를 위해 해가 저문 후에는 어떤 방문객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음 날 아침 큰절에서 20분가량 떨어진 산중에 자리 잡은 스님의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에 올라갔다. 스님의 인품처럼 고즈넉하고 깔끔한 암자였다. 수발드는 상좌도 없이 스님은 수행생활을 하고 계셨다. 스님께서는 어제의 근엄하고 딱딱한 모습과는 달리 다실에서 손수 차를 달여 주시며 다정다감하게 대해 주셨다. 수첩에 스님 말씀을 받아 적는 것도 제지하지 않으셨고 나중엔 손수 심은 후박나무 아래서 사진 촬영에도 응해 주셨다. 인터뷰를 승낙하신 셈이었다. 날아갈 듯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가 그럭저럭 정리가 잘됐다고 생각하셨는지 이후 이런저런 계기로 스님을 만날 때마다 친근감을 갖고 대해주셨다. 서울에 오시면 연락을 주셨고, 새 책을 출판하시면 친필 사인을 해 건네주시곤 했다. 기독교인인 나는 어느덧 스님의 유발상좌(속가의 머리 기른 제자)를 자처하기 시작했고 스님도 너그러이 인정해주셨다. 휴가 때 가족과 함께 불일암에 가서 스님을 뵙고 오기도 했고 선후배와 지인들을 데리고 찾아 뵐 때도 있었다. 스님은 내 영혼의 스승이었고, 불일암은 내 마음의 안식처였다. 하안거를 마친 스님과 함께 3박 4일간 해남 강진 등 남도 일대의 산천 구경을 한 것은 내 인생에 영원히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다.

스님이 1992년 강원도 산골로 거처를 옮긴 후 5년여 동안 원고 심부름을 한 것도 소중한 인연이다. 스님은 동아일보에 한 달에 한 번씩 ‘산에는 꽃이 피네’를 연재하시면서 매번 육필로 원고를 작성해 친히 서울로 오셨다. 스님께 큰절을 올린 뒤 원고를 받아 꼼꼼히 읽어보고 궁금한 대목을 여쭤본 뒤 점심과 차를 함께 나누고 회사로 돌아오면 서너 시간이 걸리곤 했으나 늘 행복했다. 오탈자가 나는 것을 몹시 언짢아하시기 때문에 원본을 복사해 편집부에 보내고 신문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원본과 대조하며 교정을 봤다. 폭우나 폭설로 하루이틀 원고가 늦어지면 스님의 안부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룬 적도 있었다. 스님의 육필원고는 지금도 가보처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이 밖에 지난 20년간 법정 스님에게서 받은 불은(佛恩)은 말과 글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과분한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 단 한 번도 스님을 취재원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스님 또한 나를 기자로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 비결이라면 비결일 것이다.
오명철 기자 oscar@donga.com

▼맑은 눈빛 속 엄정함에 셔터 누를 때마다 긴장▼
■ 6년간 렌즈에 담은 이종승 기자

법정 스님이 2009년 2월 길상사에서 행전을 묶고 있다. 정신을 집중했기 때문인지 입을 벌린 스님의 모습이 이채롭다. 기자가 인상 깊게 느꼈던 장면 중 하나다. 이종승 기자
기자는 2004년부터 6년간 길상사와 법정 스님을 카메라에 담아 왔다. 애초에 불교 사진을 찍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길상사를 촬영하고, 나아가 법정 스님을 가까이서 찍는 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스님을 뵐수록 인간의 정취가 풍겨나는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이는 스님을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을 만나면 ‘수행자 안에 있는 인간’이 보였고, 그 덕분에 스님과 나의 거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4년 동안은 거의 매일 출근 전에 길상사에 갔다. 새벽에도 가고 아침에도 갔다. 길상사 전 주지였던 덕조 스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는 기자를 보고 한결같다는 뜻으로 일여(一如)라는 법명을 줬다.

법정 스님을 자주 뵐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친견만 해도 영광이었지만, 스님을 뵙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조금씩 가까이 갈 수 있었다. 200mm 망원렌즈로만 찍다가 어느 날부터 코앞에서 찍게 됐지만 바로 앞에 다가가는 게 쉽지 않았다.

길상사에서 찍은 사진을 모아 2007년 9월 6일 일본 도쿄 올림푸스 갤러리에서 사진전을 연 이종승 기자.
2004년 12월 중순 스님께서 길상사 경전반 신도에게 강의할 때 ‘몇 번 찍었으니 더 앞으로 가서 찍어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강단 앞까지 갔다가 “어이… 여기까지 나온 걸 보니까 이 자리가 탐나는 모양이지” 하시는 바람에 신도들은 웃었지만 기자는 계면쩍었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일로 ‘비바람 불고 눈보라 친 뒤’ 스님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게 되자 기자는 스님과 어느 정도 교감을 나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의 눈은 맑음의 표시였지만 그 속에는 세상을 직시하는 엄정함도 있었다. 셔터 누르기에 열중한 내게 그 눈빛을 보낼 때 ‘이제 됐으니 그만’이라는 표시로도 전해왔다. 그 눈빛이 언제 올지 몰랐기에 기자는 카메라를 들 때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정함은 행전(行纏·한복 바지를 입은 뒤 무릎 아래부터 발목에 이르는 부분을 덮는 각반의 일종)에서도 나타났다. 스님은 평소 검은 삼베 행전을 차고 다니셨는데 그것은 언제나 빳빳했다. 스님은 설법을 위해 행지실에서 극락전으로 이어지는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도 행전을 살피셨다. 이런 모습을 찍을 때 스님을 더 이해할 수 있었고 스님 글이 왜 맑은지 느낄 수 있었다.

입적 일주일 전 문병 간 자리에서 스님 손을 한참이나 잡았다. 스님의 무소유를 세상에 알린 손을 잡으며 기자도 그 맑음의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오늘이면 스님의 육신은 구름처럼 사라질 것이다. 스님과의 짧은 만남이 아쉽다. 스님의 글과 스님을 찍은 사진이 위안이 될 것이다. 길상사의 사계를 담은 사진으로 책을 냈고 일본 도쿄에서 전시를 열었던 것도 기쁨이었다. 하지만 “일여. 신문사는 어떤가”라고 무뚝뚝하지만 정감 있게 물어오는 스님의 체취를 더는 이생에서 만날 수 없으니 “죽음은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스님의 말씀을 곱씹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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