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서하진]지금 우리는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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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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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국민의 사랑-압박감 이겨낸 매혹적 연기…

우리는 정말 행복했다. 서양인의 전유물이었던 스피드스케이팅 5000m에서 은메달을 따낸 이승훈이 시작이었다. 연이어 모태범과 이상화가 놀라운 승전보를 전해주었다. 덩치 큰 선수 틈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전혀 기죽지 않는, 폭발적인 주행을 할 때 우리 모두는 긴장과 흥분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실력 차가 눈에 보이는 종목을 관전하면서도 웃을 수 있었던 순간, 쇼트트랙 여자선수들이 잘 달리고도 석연찮은 판정으로 금메달을 놓쳤을 때 안타까웠지만 오심으로 인한 김동성 선수의 실격 때처럼 길길이 날뛰고 싶지는 않았던 것 역시 우리 선수단의 엄청난 선전 덕분이었다. 열심히 했으니 됐다, 실력 있으니 다음을 기약하면 된다,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낼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는 여유로워진 거였다.

그리고, 드디어 온 국민이 염원해 마지않던 김연아의 쾌거가 전해졌다. 올림픽 챔피언, 김연아의 이름이 퍼시픽콜로시엄에 울려 퍼질 때의 감동. 세계 1위의 위상, 쇼트프로그램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조마조마했던 건 김연아의 실력을 의심해서가 아니었다. 웬만한 이들은 김연아의 ISU그랑프리 시리즈의 연속 7회 우승, 수차례의 기록 경신에 대해 알고 있다. 김연아의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그 눈빛, 그 표정, 그 과감하고도 아름다운 동작에 압도되고 넋을 잃다 전율을 느꼈을 터이므로 그의 실력에 의구심을 품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국민들은 또한 죽음의 무도, 셰에라자드, 미스 사이공 등 그가 선택했던 테마음악을 알고 있으며 트리플 악셀, 트리플 러츠, 트리플 플립, 스파이럴 시퀀스 등 낯설었던 용어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고모의 낡은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판을 디뎠던 그가 지나온 여정, 그 많은 대회에서, 그 많은 우승을 차지하기까지 얼마만큼 혹독한 훈련을 소화해 내는지, 몇 차례나 빙판에 곤두박질치는지도 모르지 않는다.

1990년생, 이제 갓 스무 살의 김연아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피겨 선수로서의 그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군포 수리고를 졸업한 그가 어느 대학에 입학했는지, 대학에 간 첫날 학교가 어떻게 들끓었는지 매체마다 경쟁적으로 보도했으므로 귀와 눈이 있다면 모를 수 없었던 이들은 김연아가 어느 날 어떤 의상을 입었는지, 어떠한 모양의 귀걸이를 했는지 그날의 화장법은 어떠했는지 알고 싶어 했으며 알고 있다. 희귀병 어린이를 위해, 중국 쓰촨 성의 지진 피해자에게, 아이티의 절박한 이들에게 얼마만큼의 기부를 했는지도 상세히 안다.

164cm의 키, 47kg의 가뿐한 몸무게, 70cm의 긴 팔을 갖고 있으며 하체가 상체에 비해 무려 두 배 가까운, 환상적인 몸매의 소유자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어느 소녀 그룹의 노래를, 당장 음반을 내도 좋을 정도의 실력으로 부르는 김연아를 본 사람이라면 도무지 못하는 것이 없는 신기한 인물로 그를 기억한다. 빙판 위에서 춤을 추거나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여행길에 오르거나 귀여운 미소를 지어 보이거나 사뭇 장난꾸러기처럼 뛰어다니거나 하면서 은행을, 휴대전화를, 에어컨을, 자동차를 광고하는 김연아를 보며 안티가 없다더니 정말 그렇구나, 앙드레 김에게도 인정받았다더니 과연 패션 감각이 뛰어나구나 절감하게 되니 김연아에 대한 관심과 집중은 국민 여동생이라는 별칭에 걸맞은, 가히 전 국민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 시대의 아이콘이며 광고계의 블루칩이며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선수로서 그가 느낄 압박감이 얼마나 컸을지….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국민의 기대감이라던 미국 방송 진행자의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숨조차 쉬기 어려웠을 중압감을 이겨내고 역동적이고도 매혹적인 연기를 펼쳐 보인 김연아. 228.56점이라는, 피겨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며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그가, 그가 지내온 날이 눈물겹게 고맙고 너무도 미쁘다.

겨울올림픽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남의 잔치로 여겨지던 행사였다. 이영하라는 선수가 스피드 종목에서 세계인과 겨루던 시절, 참가만으로도 목청을 높이던 아나운서의 흥분을 기억하는가. 쇼트트랙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만 해도 이처럼 이른 시간 안에, 이토록 놀라운 성과를 기대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종목을 불문하고 먼저 경기를 치른 우리 선수의 기록이 아래로, 아래로 처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시절. 그런 힘겹고 고달픈 시기를 겪었던 많은 선수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출발선에 섰던 그 슬프고 용감한 도전에, 그 땀과 눈물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그들을 보며 가슴 졸였던 우리들 모두에게도.

축제는 이제 막을 내리려 한다. 메달을 딴 선수에게 축하를, 따지 못한 선수에게는 따뜻한 격려와 위로를 전하며 이 기쁨과 감동을 거름 삼아 새로운 날을 준비할 시간이다. 다시, 행복하다.

서하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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