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필용 사건’ 연루 37년만에 무죄 김성배 예비역 준장

동아일보 입력 2010-01-22 03:00수정 2010-01-2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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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 아버지 묘 한번 못가
명예 찾는 날 현충원 달려갈것”

“잘못된 수사 규명하려 ‘인고의 세월’
손녀에 부끄럽지 않기위해 재심 청구
아내가 손으로 베낀 수천쪽 수사기록
‘무죄’ 밝혀내는데 결정적 역할”
“이제야 아버님을 찾아뵙고 그 곁에 묻힐 수 있게 됐습니다.”

그에게선 이제 빗발치는 총탄 속에 베트남의 전장을 누볐던 맹호부대 1연대장의 용맹을 읽을 수 없었다. 37년간 가슴을 묵직하게 짓눌러왔던 설움을 덜어낸 그는 “이제 모든 일을 다 용서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73년 이른바 ‘윤필용 사건’에 연루돼 1년간 옥살이를 한 예비역 준장 김성배 씨(78)는 최근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달 초 검찰이 상고를 포기해 무죄가 확정됐다. 그는 “쓰라린 상처를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몇 번이나 인터뷰를 거절했다. 거듭된 설득 끝에 20일 그의 변론을 맡았던 법무법인 바른의 박주범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긴 세월 가슴속에 쌓아 뒀던 회한을 털어놨다.

○ “부끄러운 할아버지가 되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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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필사해 놓은 수사기록이 37년 만에 남편의 무죄를 밝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최근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김성배 예비역 준장이 당시의 쓰라린 기억을 떠올리며 수사기록을 넘겨보고 있다. 김재명 기자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한 직후인 1973년 3월.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소장)이 이끄는 육군 내 사조직 ‘하나회’가 정권을 뒤엎는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당시 3사관학교 생도대장(준장)이었던 김 씨도 여기에 휘말렸다. 그해 3월 26일 보안사령부에 끌려간 그는 뇌물을 주고받은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년간 복역하다 가석방됐다. 계급은 이등병으로 강등됐다. 그는 가산을 정리해 충남 천안의 한 농장으로 내려갔다.

“여기 밤나무가 어디 있나?” 농장에 도착해 한참을 말이 없던 그가 아내 최모 씨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우리 사과 장사나 할까?” 그는 하루에도 수십 차례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군인으로서의 명예와 자긍심을 짓밟힌 상처는 그만큼 깊었다. 그러다 ‘너희들이 날 죽이려는데 내가 죽나 봐라’라는 오기가 생겼고 그 오기로 몇 년을 버텼다. 힘들여 키운 밤나무와 사과나무가 그를 지탱해 준 힘이 됐다.

김 씨는 “독립투사였던 아버지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는데 이번 무죄 판결로 아버지 곁에 묻힐 수 있게 돼 가장 기쁘다”며 “(억울하게) 더러워진 몸이 부끄러워 아버지와 전사한 동료, 부하들의 묘역에 한 번도 참배를 못했는데 육군이 제적 명령을 취소하는 날 가장 먼저 국립현충원을 찾아가겠다”고 밝혔다.

김 씨의 부친은 광복 후 통위부(국방부의 전신)에 근무하며 국군 창설에 기여한 김진성 씨. 일제강점기 아버지가 갇혀 있던 서대문형무소 옆에 살면서 어머니의 엄한 애국 교육을 받은 것이 그가 국군에 투신한 계기가 됐다. 김 씨는 왜 이제야 재심을 청구했느냐는 질문에 “2007년 얻은 첫 손녀에게 증조부만큼 할아버지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 승진기념으로 받은 ‘행운의 열쇠’를 뇌물로 기록


김 씨가 지난해 12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게 된 데는 아내가 사건 당시 필사해 놓은 수천 장의 수사기록과 증거기록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판결문은 영구 보존되지만 수사기록 등은 5년이 지나면 폐기된다. 최 씨는 “재심을 염두에 뒀던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크면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필사해 뒀다”고 말했다. 이 자료에는 당시 보안사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허위자백 강요에 관한 정황들이 낱낱이 적혀 있다.

그가 부하 장교에게서 선물로 받은 조잡한 바둑판과 동기들에게서 승진 기념으로 받은 ‘행운의 열쇠’가 각각 4만 원짜리 뇌물로 기록됐다. 베트남에서 돌아오며 윤필용 소장에게 주려고 미군 PX에서 산 30달러짜리 술잔도 4만 원짜리 뇌물로 둔갑했다. 당시 준장의 월급은 7만∼8만 원이었다. 김 씨는 보안사 조사 당시의 상황을 말해 달라고 하자 “제발 그때 일은 묻지 말아 달라”며 손을 내저었다.

김 씨는 윤 소장을 두세 차례 만났을 뿐 친분이 깊지 않다고 말했다. 맹호부대 연대장을 맡아 베트남에 가기 직전인 1971년 맹호부대장으로 근무했던 윤 소장에게 파병부대의 지휘에 대한 조언을 들으러 찾아갔고, 1년 뒤 귀국해 감사인사를 드렸다는 것. 당시 보안사는 ‘영남계 장교 숙청’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윤 소장의 방명록에 등장한 비(非)영남계 인사인 김 씨를 표적 수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 “나는 영원한 군인”

김 씨는 무죄가 선고되던 순간 법정에서 재판장인 성낙송 서울고법 부장판사에게 거수경례를 한 것으로도 화제가 됐다. 성 부장판사가 김 씨에게 “독립투사였던 선대부터 국가에 공헌해온 만큼 이제 명예가 회복됐으니 앞으로도 국가에 기여하기 바란다”고 당부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국가에 기여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경례를 한 것. 김 씨는 “지금 내 옷은 사복이지만 마음만은 영원히 군인”이라며 “무죄 선고를 받는 순간 너무 감격해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고 말했다.

무죄가 확정된 뒤 그는 툭하면 잠이 든다고 했다. 그는 “37년간 단 한 번도 잠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마음속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으니 밀렸던 잠이 쏟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내가 ‘호랑이 울음소리’라고 부르던, ‘어흐’ 하고 수시로 내뱉던 깊은 한숨소리도 더는 토해내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반평생을 함께 해온 고통과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탓일까. 그의 손은 2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손현성 인턴기자 고려대 언론학부 4학년
이재희 인턴기자 고려대 언론학부 4학년
:: 윤필용 사건::
1973년 초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형님이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의혹을 사 그를 따르는 ‘하나회’ 후배 10명이 구속되고 31명이 예편된 사건. 이 사건으로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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