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34>여기자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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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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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에 소개된 ‘부인기자’ 최은희.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5년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에 소개된 ‘부인기자’ 최은희. 동아일보 자료 사진
신여성 독자 요구에
‘부인기자’ 동분서주
사회운동가 역할도


《“조선 부인은 여러 관계로 너무도 부자연하고 무리막심한 환경에 처하얏섯지만 그 고통이 컷던 것만큼 부인운동이 고밀도이엇스며 옆에서 바라보기에 위험일만큼 가속도로 사상경향이 변천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미래의 부인운동으로 좀더 이상화하기 위하야 이후 과거 십년간 조선부인의 운동 역사를 살펴볼 생각이 북바쳐 닐어날뿐입니다.”
―동아일보 1929년 1월 2일자 부인(婦人)기자 최의순》여성 기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동아일보를 비롯한 민간신문이 창간된 1920년 이후부터였다. 당시에는 ‘여기자’라는 말 대신 기혼 미혼 구분없이 ‘부인기자’라는 이름을 썼다. 1924년 최초의 민간신문 여기자인 최은희가 등장한 후 신문사들은 경쟁적으로 여기자를 채용했다. 신문사의 이미지 쇄신과 다변화하는 독자들의 요구 충족을 위해 여기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인 유교 관습이 뿌리 깊은 시대에 등장한 여기자들은 ‘장안의 명물’이었다.

1925년 3월 11일자 동아일보에는 부인기자 최은희를 인터뷰한 ‘기자의 생활’이란 기사가 실렸다. ‘여유 없는 생활’ ‘몸은 날로 허약, 그래도 자미있는 직업’ 등이 소제목으로 뽑힌 이 기사는 고군분투하던 여기자들의 일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매일 아츰이면 일즉이 니러나서 밥도 뜨는 듯 마는 듯 마치고는 동으로 서으로 아는 집 모르는 집으로 장안이 좁다하고 도라다니게 됩니다…기사재료를 구하러가지 않으면 안이 될 밧분 몸입니다.”

여기자들은 가정면 문예면 등에서 여성계와 문화계의 다채로운 소식들을 전했지만 제한된 역할에만 머물지 않았다. 여성의 사회활동에 제약이 심했던 시대였지만 적극적인 현장 취재를 통해 화제가 되는 사회 실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동아일보에는 1929년 6월 6일부터 3회에 걸쳐 점(占)집을 잠입취재한 부인기자의 ‘불행한 녀성 속이는 태주의 정톄는 무엇’이 실렸다. 최의순은 1928년 12월 13일부터 동아일보에 의학박사 윤일준 씨, 춘원 이광수 등 사회 각계 저명인사들을 인터뷰한 ‘서재인 방문기’를 12회 연재했다.

고등교육을 이수한 신여성으로서 이 시기 여기자들은 민족운동가, 여성운동가로서의 사회적 역할도 담당해야 했다. 동아일보 최초의 여기자인 허정숙은 사회주의 여성단체 경성여성동우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여성단체 삼월회와 경성여성동우회 등에 참여하면서 여성해방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이현경은 1927년 조직된 항일여성운동단체 근우회의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여기자들은 여성계 소식을 전하는 일로 여성계몽운동에 기여하기도 했다. 최의순은 1929년 1월 1일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십년간조선여성의 활동배태기에서 활약기에, 활약기에서 다시 침체기에’ 기사를 시작으로 3회에 걸쳐 조선의 여성운동사를 정리했다.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에 힘입어 2009년 현재 언론계 전체의 여성 종사자 비율도 20.5%에 이르렀다. 수습채용에서 여기자들의 약진이나 여성 편집국장의 탄생 등을 보면 사회 곳곳에서 두드러지는 ‘여성파워’는 언론계에서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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