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권재현] 쌀의 햄릿, 흙의 햄릿, 톱밥의 햄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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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9일 18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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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연극연출가 로베르토 바치가 이끄는 폰테데라 극단의 '햄릿-육신의 고요‘는 톱밥을 주요 오브제로 택했다.
이탈리아 연극연출가 로베르토 바치가 이끄는 폰테데라 극단의 '햄릿-육신의 고요‘는 톱밥을 주요 오브제로 택했다.


오, 연극의 왕자여, 당신의 이름은 햄릿, 햄릿, 햄릿….

사색의 계절, 11월은 '햄릿'으로 단풍이 들었습니다. 양정웅 연출의‘햄릿'(10월30~11월8일)과 이윤택 연출의‘햄릿(11월5일~22일) 그리고 이탈리아 연극연출가 로베르토 바치의‘햄릿-육신의 고요'(11월14, 15일)가 잇따라 무대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세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거의 그대로 살리면서 특유의 스타일을 통해 미묘한 해석의 차이를 끌어냈습니다.

올해 서울공연예술제 초청작으로 공연된 '철종 13년의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의 연극작품 37편의 내용을 한편에 압축한 연극입니다. 일본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원작을 극단 미추에서 번안한 이 작품은 첫머리를 '만약에 셰익스피어가 없었더라면'이란 노래로 시작합니다. 그중에 "만약에-/ 셰익스피어가 없었으면/ 창작극뿐인 연극판/ 먹고 살기 정말 힘들었겠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빙고!, 정답입니다. 올해만 해도 얼마나 많은 셰익스피어 작품이 공연됐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중 단 한편만 뽑으라면 '햄릿'과 '리어왕'이 경쟁을 펼치겠지만 '햄릿'이 맨 마지막에 남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왜 '햄릿'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심지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저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그 유명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의 첫 구절,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에 '햄릿'의 첫 장면이 삽입돼 있음을 간파하면서 시작합니다. 햄릿이 아버지의 망령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종언에 대한 반박으로 쓰인 이 책의 키워드는 또한 "시간은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는 햄릿의 대사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셰익스피어를 통해 독해한 마르크스이기도 합니다.

이제 11월을 장식한 세 편의 햄릿으로 여러분을 안내하고자 하는 이유는 '햄릿'이 그토록 오랜 세월 '연극의 왕자'로 군림하는 이유를 함께 찾아보기 위해서입니다. 흥미롭게도 세 편의 '햄릿'에는 세 개의 오브제가 등장합니다. 각각 쌀, 흙, 톱밥입니다. 그 오브제가 상징하는 것을 중심으로 세 '햄릿'을 따라 가보겠습니다. 그 첫 작품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 양정웅의 '햄릿'입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쌀의 햄릿'

양정웅 연출이 이끄는 극단 여행자의 '햄릿'의 키워드는 굿입니다. 우선 무대 자체가 대형 굿판을 연상시킵니다. 무대 한복판에 대형 멍석이 깔려있고 객석을 제외한 3면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당이 신령을 모셔놓은 신당(神堂)에서 볼 수 있는 각종 무신(巫神)이 그려진 대형 무신도입니다.

연극은 햄릿의 이야기 세 고비에서 한국적 굿판을 펼칩니다. 첫째는 삼촌 클라우디우스(정해균)와 어머니 거트루트(김은희)가 결혼한 것에 환멸을 느낀 햄릿(전중용)이 아비의 넋을 달래기 위해 펼치는 진오기굿입니다. 원작에서 부왕의 유령을 통해 동생에게 독살당한 그 죽음의 진실을 전해 듣는 것이 부왕의 넋과 접신한 세 무당의 입을 통한 것으로 바뀝니다. 둘째는 햄릿이 사랑한 오필리어의 장례 장면에선 물에 빠져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는 수망굿이 펼쳐집니다. 마지막은 독이 묻은 검에 찔려 죽어가는 햄릿을 위한 굿입니다. 여기에선 죽기 전에 자신의 진오기를 미리 하는 산진오기굿이 펼쳐집니다.

한국 전통 무속은 굿 장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곳곳에 등장합니다. 클라우디우스가 죄책감을 못 이겨 신에게 기도하는 장면은 신당에서 '비나이다, 비나이다'하고 기도하는 기복신앙의 기도로 바뀝니다. 거트루트가 아들의 송곳 같은 비난에 몸부림치는 장면에서도 정화수를 떠다놓고 손을 비비며 비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오필리어의 무덤을 파는 광대들이 부르는 노래는 '나무아비타불'과 '관세음보살'을 후렴구로 하는 무당의 구음(口音)으로 대체됩니다.

양정웅 연출이 이끄는 극단 여행자의 '햄릿'은 한국 무속과 접목하면서 주요 오브제로 쌀을 활용했다.
양정웅 연출이 이끄는 극단 여행자의 '햄릿'은 한국 무속과 접목하면서 주요 오브제로 쌀을 활용했다.


이런 무속신앙을 상징하는 오브제가 바로 쌀입니다. 무대 중앙 멍석이 깔린 사방 바닥을 모래가 아닌 흰쌀로 채워 넣었습니다. 배우들은 공연 도중 멍석을 벗어나 이들 쌀더미 위에서 뒹굴거나 쌀을 집어 던지며 분노와 고뇌를 표현합니다. 클라우디우스나 거트루트가 하늘에 기도를 드릴 때 촛대를 꽂은 놋그릇을 가득 채운 것도 쌀입니다.

쌀은 농경민족에게 생명을 상징합니다. 쌀의 어원에 대해선 산스크리트어로 쌀을 뜻하는 사리(sari)에서 왔다는 설과 '씨의 알'의 축약어로 이뤄졌다는 설, 먹으면 '살(肉)'이 되고 사람이 살(生)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양식이란 의미에서 '살'에서 비롯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생명의 알갱이라는 인식이 녹아있다는 것입니다.

쌀에는 죽음과 생명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벼의 씨앗인 쌀이 희생될 때 생명의 탄생 내지 유지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쌀이 땅에 묻혀 새로운 벼의 씨앗을 탄생시키는 것이나 쌀이 사람의 뱃속에 들어가 살(肉)이 되는 과정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래서 농경민족의 무속신앙에서 쌀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시켜주는 영매(靈媒)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무당의 굿에 쌀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쌀의 햄릿'이 상징하는 것은 뚜렷해집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존재로서 햄릿을 샤먼(무당 또는 영매)의 원형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연극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독백에서 시작한다는 점은 그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합니다. 물론 양정웅의 '햄릿'은 아직 이런 인식까지 발효하진 못했습니다. 빛나는 청춘의 계절을 회색빛 고뇌로 채워야했던 햄릿의 영혼에 대한 일종의 살풀이란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나 무당이 신으로 모시는 인물들이 바로 한 많은 생애를 살다간 인물임을 자각한다면 '햄릿=샤먼'의 구도로 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작품의 굿과 햄릿의 접목이 화학적 결합이 아니라 물리적 결합에 머물고 만 것도 바로 이러한 각성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굿을 단순히 삽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용해되도록 하기 위해선 무당과 극중극을 펼치는 배우들에게만 한복을 입히고 국적불명, 시대불명의 옷을 입힌 넌센스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햄릿=샤먼'이란 등식이라면 등장인물 전체가 한복을 입고 나와야합니다. 특히 MBC 개그맨 김경진을 연상시키는 '추리닝 입은 햄릿'만큼은 제발 다음 무대에서 변화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흙의 햄릿'

두 번째 작품은 이윤택 연출이 이끄는 연희단거리패의‘햄릿'입니다. '오프 대학로'라 불리는 혜화동 로터리 북쪽 명륜동1가에 새로 문을 연 '눈빛극장' 개막공연인 이 작품은 이윤택 연출이 1996년 연희단거리패 10주년 기념작으로 발표한 작품을 새로 가다듬은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이씨는 딸 채경 씨를 통해 셰익스피어 아든 판을 완역해 대사와 연기를 보완했다고 합니다.

가장 한국적 햄릿으로 불렸던 이 작품은 내년 4월 루마니아에서 열릴 제7회 국제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의 공식 초청작입니다. 이 페스티벌은 매년 셰익스피어의 작품 하나를 선정해 세계 최고의 연출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주는 연극축제입니다. 이번 공연은 미국의 로버트 윌슨, 독일의 토마스 오스터마이어, 러시아의 유리 부투소프, 리투아니아의 오스카라스 코르슈노바스의 '햄릿'과 맞대결을 펼칠 이윤택 '햄릿'을 미리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흙을 주요 오브제로 활용한 연희단거리패의 \'햄릿\'. 이윤택 연출이다.
흙을 주요 오브제로 활용한 연희단거리패의 \'햄릿\'. 이윤택 연출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윤택의 '햄릿'에선 죽음의 향기가 강렬했습니다. 관이 들어갈 구덩이가 한복판에 파인 짙은 검은 색 무대부터 그렇습니다. 이 구덩이는 연극의 시작을 장식하는 햄릿 부왕의 장례식에서 부왕의 시신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또 오필리어(신주연)의 시신이 들어갈 공간이자 극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 전체를 뒤덮는 황토색 천을 헤치고 극중 죽어 넘어진 인물들이 하나둘 씩 기어 나오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흙은 이 작품을 상징하는 오브제입니다. 극 중간 영국으로 떠났다가 몰래 덴마크로 돌아온 햄릿(윤정섭)이 오필리어의 무덤을 파는 무덤지기(김미숙)를 만나는 장면에선 실제 흙이 등장합니다. 무덤지기들이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세상만사 땡이로구나/ 이쁜 년도 못난 년도 별수 없구나"라는 노래를 부르며 무덤 밖으로 흙더미를 쌓습니다. 햄릿과 무덤지기는 그 흙에 물을 부어 만든 진흙으로 유희를 펼칩니다.

그 소극은 곧이어 오필리어(신주연)의 장례식이란 비극에 짓눌려버리고 맙니다. 오필리어의 오빠 레어티즈(염순식)가 슬픔을 못 이겨 무덤 속 오필리어를 안고 "이제 흙을 쌓아 올려라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똑같이"라고 할 때 무덤지기들은 삽으로 그 흙을 퍼서 두 사람의 얼굴에 인정사정없이 뿌립니다.

단련된 연기자들이 펼치는 연극은 진흙처럼 찰집니다. 햄릿 역의 윤정섭은 길쭉한 신체와 깊은 울림통을 십분 활용해 순수와 광기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펼치는 위태로운 햄릿을 잘 형상화해냈습니다. 클로디어스 역의 이승헌은 조카이자 아들의 연인인 오필리어까지 범하는 악독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거트루드 역의 김소희는 아름다운 애욕에 불타면서도 모성애 또한 극진한 야누스적 아름다움을 빚어냈습니다.

그 배우들이 흙 범벅이 된 얼굴로 무덤 밖으로 기어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흙에서 태어난 너희, 흙으로 돌아가리라"라는 강렬한 허무의 힘을 뿜어냅니다. 그것이 단순한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한 극적 장치가 무대 전체를 뒤덮은 황토빛 천입니다. 그를 통해 "죽음 앞에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메시지가 강렬히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무차별적 운명 앞에 선 '톱밥의 햄릿'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로베르토 바치 연출의‘햄릿-육신의 고요'는 햄릿을 제외한 다른 6명의 배우 모두가 똑같이 하얀 펜싱복과 펜싱투구를 쓰고 등장합니다. 펜싱 칼을 들고 햄릿을 위협하는 그들은 극중 배역을 마음대로 넘나듭니다. 그들은 대사가 필요한 장면에서만 투구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는데 특정 배역이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일례로 두 명의 여배우는 거트루트와 오필리어 역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연기합니다. 두 여배우가 한 배역을 나눠서 연기할 때도 있습니다.

홀로 외로이 검은 옷을 입은 햄릿은 검 한 자루만 들고 그들 모두를 상대해야합니다. 대사는 분명 햄릿의 것이지만 몸은 6대 1의 힘겨운 싸움을 펼쳐야합니다. 그는 음산한 조명과 전자음이 흐르는 가운데 바퀴 달린 이동식 철제구조물에만 의지한 채 얼굴을 바꿔가며 등장하는 여섯 명의 익명의 존재와 돌아가며 검투 대결을 펼쳐야합니다. 얼굴엔 곤혹스럽고 당황한 표정이 역력할 뿐 분노와 광기의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가장 불쌍한 햄릿입니다.

익명의 존재로서 여섯 배우는 운명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가혹하게 햄릿을 몰아대고 위협하다가 투구를 벗은 잠시잠깐만 친절한 인간의 얼굴을 드러냅니다. 펜싱 검끼리 부딪치는 금속성 소음과 철제구조물의 삐걱 이는 불협화음은 이런 삭막함을 더욱 강화합니다. 운명은 예정된 시간과 사건으로 햄릿을 몰아넣고 햄릿은 예정된 비극에 몸을 맡긴 채 숨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작품을 상징하는 오브제는 톱밥입니다. 펜싱투구 뒤에 숨은 여섯 명의 배우는 톱밥이 가득 들어가 있는 포대자루에서 왕관과 홀, 스카프 등 그 때 그 때 배역에 필요한 소도구들을 꺼내듭니다. 이 포대자루 속 톱밥은 레어티즈가 햄릿을 죽이겠다고 천명하는 순간 해골들과 함께 무대 밖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연극은 그 톱밥더미 위에 해골을 올려놓고 그 위에 왕관을 씌우면서 끝납니다.

톱밥은 무차별성을 상징합니다. 어떤 목재든 톱밥으로 깎아놓으면 모두 똑같아집니다. 이 연극 속 햄릿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여섯 명의 배우는 무차별적 존재입니다. 햄릿은 그런 운명의 무차별적 공격에 희생된 가엾은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그의 분노와 광기, 정의감은 그 운명의 수레바퀴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져나가는 낙엽보다 못합니다.

이야말로 지독한 허무입니다. 하지만 햄릿의 거친 숨소리가 멈추고 찾아온 고요가 묘한 위로가 됩니다. 그 순간 깨닫습니다. 아, 햄릿이야말로 삶과 죽음 사이의 텅 빈 시공간을 채운 인간의 땀과 숨을 상징하는 존재이구나. 역사 또는 운명이란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서 어떻게든 그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기 위해 땀과 피를 흘리지만 결국엔 무(無)로 돌아갈 인간 주체(主體)의 슬픈 그림자이구나 하는 그런 깨달음입니다. 해골에 씌워진 왕관, 그것이야말로 '연극의 왕자'로서 햄릿의 진면목인 것입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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