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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극장냄새 좋아 무대의상만 만들죠”

입력 2009-09-25 02:51업데이트 2009-10-10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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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연극-발레의상의 거장
리언 베커르스 씨 방한 전시회

《세계적 무대 의상 디자이너 리언 베커르스 씨(59)가 한국에 왔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지금까지 180회 이상의 오페라와 연극, 발레 공연의 무대 의상을 맡아 온 ‘거장’이다. 네덜란드의 대형 극단인 토닐 그룹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 ‘리처드 3세’ 등의 의상을 제작했던 그는 현재는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예술대에서 극장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 국내에선 생소한 무대 의상 디자이너의 세계가 궁금해 그를 18일 만났다.

베커르스 씨가 이번에 방한한 건 ‘2009 세계 무대 디자인 엑스포(wsd2009)’ 때문이었다. 이 행사는 세계무대 미술, 기술 및 건축가협회(OISTA)가 4년에 한 번 여는 무대 예술전이다. OISTAT가 주최하는 프라하 국제무대 미술전(PQ)과 함께 양대 국제적 무대 예술 행사다. 그는 2007년 PQ와 wsd2009에서 모두 ‘honorable designer’로 뽑혔다. 이 행사의 한 프로그램으로 서울 종로구 동숭동 쇳대 박물관은 16∼21일 ‘리언 베커르스 특별전’을 열었다.》

○ 무대 의상은 작품 텍스트에서 시작한다

18일 방문한 이 전시에선 그가 2년 반 동안 매달려 작업한 미니어처 무대 의상 25점이 전시되고 있었다. 고전주의 3대 극작가로 꼽히는 프랑스 피에르 코르네유의 ‘르 시드’,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 드 베라주라크’, 영국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오셀로’ 등이 그의 창조성의 ‘원천’이었다.

―왜 미니어처로 전시를 하게 됐나요.

“그동안 선보이지 않았던 디자인을 새롭게 한국에 내놓으면서 더 집약적으로 옷의 미적 균형 감각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러기엔 미니어처가 제격이죠.”

그의 작품들은 고풍스러운 장식 미술관 전시품과 현대의 산업 디자인 제품을 동시에 연상케 했다. 알루미늄과 실크를 정교하게 섞은 옷감은 만지는 대로 구김을 만들어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짧은 시)의 등장인물 옷은 하나하나 손바느질한 장식, 무수히 많은 자개단추를 달아 표현한 아름다운 갑옷으로 거듭났다. 그런데 목에 쟁반을 두른 듯한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러프(ruff·주름 깃)와 짧은 페티코트 밑에는 풍성하게 퍼지는 치마 대신 고쟁이 모양의 바지가 매치돼 있었다. 분명 여성복이었다.

“무대 의상은 재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객이 한없이 지루해할 테니까요. 그래서 16, 17세기 여성들의 옷에서 치마를 없애 버렸습니다. 그 대신 속옷 바지가 겉으로 드러나게 했죠. 강한 여성성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전 옷을 만들게 되는 작품을 적어도 세 번 이상 정독한 뒤 텍스트를 분석합니다.”

○ “무대의상은 현재와 과거의 역사를 결합한 퓨전 예술”

그는 네덜란드 틸버그 드로잉 아카데미를 나온 뒤 암스테르담 리트벨트 아카데미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런데도 패션 디자인 분야로 뛰어들지 않고, 30여 년간 묵묵히 무대 의상 디자이너의 길을 걷고 있다. 왜 그럴까.

“극장의 ‘냄새’가 좋았다고나 할까요. 패션 디자인은 지금 이 순간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차림새, 즉 트렌드를 봐야 하죠. 하지만 무대 의상 디자인은 연극과 오페라의 텍스트를 파고들죠. 지금 일어나는 일과 과거의 역사를 결합한 퓨전 예술이 무대 의상인 셈입니다. 제게 있어서는 세트, 조명 담당자들과 함께 팀을 이뤄 작품을 완성해 내는 것도 인생의 즐거움이었어요. 배역에 감정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게 제가 하는 일입니다.”

미국의 유명 무대 의상 디자이너 퍼트리샤 지프로트 씨는 살아가면서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이 별안간 나타나는 자동차 여행에 무대 의상 디자인을 비유한 적이 있다. 베커르스 씨는 무대 위 상황들의 스릴을 즐기는 동시에, 인도와 아프리카 등을 여행하며 그곳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연극 ‘오셀로’의 남성복은 아프리카인들의 보디 페인팅에서 착안해 디자인했어요. 아프리카인들이 나신에 검은색과 흰색으로 가득 그림을 그린 걸 보고 저 모양으로 옷을 만들겠다고 생각했죠.”

―연극 ‘레이디 맥베스’에서 맥베스 장군의 아내 옷은 빨강입니다. 왜 빨강인가요.

“레이디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맥베스 아내의 죄의식에 천착해 재해석한 작품이죠. 맥베스 장군의 아내는 권력욕에 불타 맥베스를 사주하는 인물입니다. 극 자체가 드라마틱한 구조이고, 내용 중 피가 나오기 때문에 최대한 강렬한 명도와 채도의 빨강을 택했습니다. 역시 치마는 없애고 속바지를 드러냈고요.”

―무대 의상에서 감정을 표현하는데 색상의 느낌을 자주 활용하나요.

“물론입니다. 빨강은 사랑, 힘, 피, 돈, 욕망을 두루 드러내죠. 검정과 금색의 조합은 미학적 아름다움과 다가올 죽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노랑은 증오, 초록은 희망입니다.”

○ 한국 여성들의 구두는 너무 높다

세계적 무대 의상 디자이너의 눈에 한국 여성들의 패션은 어떻게 비쳤을까.

“한국 여성들의 뛰어난 패션 감각에 무척 놀랐습니다. 그런데 밤 파티 때가 아닌, 평소 일하는 차림새에서조차 너무 차려 입는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구두 굽은 또 어찌나 높은지…. 제가 주로 활동해온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에선 입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편안한 옷이 감각 있다고 여겨지거든요.”

그는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을 좋아한다고 했다. 무대 의상가로서 그의 판타지를 최대한 실현시킬 수 있는 작품성과 예술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성철 한국무대미술가협회장은 “리언 베커르스 씨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정성과 마음 자세, 무대 의상을 향한 열정이 남달리 탁월하다”며 “한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그를 통해 배웠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베커르스 씨는 인터뷰 동안 “진정한 무대 의상은 텍스트에서 시작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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