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창씨개명 ‘香山’은 묘향산 의미”

  • 입력 2009년 5월 11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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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론 친일파, 속으론 독립 열망”
이광수 연구서 펴낸 김원모 교수
“실증 연구 없이 편협한 매도 안돼”

“춘원 이광수의 창씨개명인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향산광랑)의 ‘향산’은 일본 국왕이 2600년 전 즉위한 향구(香久)산이 아니라 단군조선이 창건된 묘향산에서 유래했습니다.”

원로 사학자인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75)가 춘원 이광수를 조명한 저서 ‘영마루의 구름’(단국대출판부·사진)에서 “이광수의 친일은 민족의 보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겉으로는 친일을 했지만 내면으로는 철저히 독립을 원했다”며 파문을 예고하는 논쟁을 제기했다. 11일 출간된 이 책은 분량이 1216쪽에 달하는 대형 학술서다. 김 교수는 근대 한미교섭사와 태극기 연구의 권위자다.

“1940년 맨 먼저 창씨개명을 한 이광수는 1948년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수감된 뒤 ‘일제에 협력하면서 참정권과 평등권을 얻어 민족을 보존하면 독립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진실한 고백이었는지, 일제강점기 이광수의 행적에 실제로 그런 측면이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김 교수는 조선총독부 경무궁 소장 비밀문서’(국회도서관)의 동우회 재판 기록에 실린 이광수의 시를 근거로 ‘향산’은 묘향산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시는 이광수가 1936년 동우회 회원인 이영학에게 써준 것이다. 동우회는 이광수가 주도해 만든 계몽단체로 독립운동을 이유로 1937∼38년 회원들이 검거돼 재판을 받았다.

이 시에는 “신시(神市) 삼천중(三千衆)에 이 몸도 바치리라/그분의 옛터에서 새로운 일 할 때 향산(香山)의 나무 한 그루 커서/이 몸 받아들여주소서”라는 대목이 있다.

“환웅이 태백산(묘향산을 가리킴) 신단수(神壇樹)에 내려와 세운 도시가 신시(神市)입니다. 재판 기록에는 이광수가 이영학에게 정몽주의 단심가를 일부 개작한 시를 부채에 써주며 ‘향산’을 그의 호로 지어준 사실도 있습니다. 향산에 친일 부역이 아니라 민족정신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는 증거죠.”

김 교수는 이광수가 1941년 중국 난징(南京) 대동아문학자대회에 함께 참석한 소설가 김팔봉에게 “우리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생겨 조선 사람의 문부대신도 육군대신도 나오게 되는 날이면 그때 가서야 일본인이 깨닫고서 이러다가는 일본이 조선인의 나라 되겠으니 안 되겠다 하고서 살림을 갈라가게 된단 말이오.…그제야 우리는 삼천리강토를 찾아가지고 독립한단 말이요”라고 말한 사실도 책에 소개했다.

김 교수는 춘원이 경성일보(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일본어로 발행된 신문) 창간을 주도한 도쿠토미 소호에게 1940년 일본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창씨개명의 이유를 밝힌 편지를 1989년 발견했다. “처음엔 편지 내용에 수치심을 느꼈죠. 하지만 자료를 뒤져 연구를 계속하면서 친일과 관련된 이광수의 다른 면모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김 교수는 이광수 친일연구와 관련해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처럼 좁은 대롱으로 대상을 보듯 실증 연구 없이 일제강점기 인물의 한 면만 편협하게 부각해 매국노로 매도하는 학계의 분위기는 잘못됐다”고 말했다.

한국근대문학 연구자인 김재용 원광대 교수는 김 교수의 연구에 대해 “이광수의 삶을 볼 때 친일 행적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광수는 1937년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조선 독립의 가능성이 없어졌다고 보고 일본 민족과 조선 민족이 일본의 국민으로 동등하게 사는 것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고 본 것”이라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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