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희 “미야자키의 비극…내 실력 1% 모자랐다”

  • 입력 2008년 12월 31일 0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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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아듀 인터뷰

“모두들 상금왕이 된 것처럼 축하해주었어요. 저도 그렇게 될 줄 알았고요. 그런데 마지막 날 마지막 홀에서 우승자가 뒤바뀌면서 상금왕도 날아갔죠. 당시에는 아쉬운 마음도 컸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다 잊었어요.”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상금왕 타이틀을 마지막 대회의 마지막 홀에서 놓쳤다. 오히려 주변에서 난리였다. “한국인으로 처음 해외투어에서 상금왕에 오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놓쳐서 너무 아쉽다”며 격려가 쏟아졌다.

상금왕에 오르지 못했지만 이지희(29·진로재팬)는 홀가분했다. “내 실력이 여기까지 인 것 같아요. 1%가 부족했죠. 자력으로 상금왕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놓쳤으니 제 실력이 모자란 거죠.”

그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한 달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11월 30일 일본 미야자키골프장에서 열린 JLPGA투어 시즌 최종전 리코컵 투어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였다.

일본의 고가 미호는 4언더파 68타를 때려 4라운드 합계 6언더파 282타로 역전승했다. 선두에 3타차 공동 6위로 라운드에 나서 뒤집기 우승을 차지한 고가는 상금 2500만엔을 받아 1616만엔이나 앞서 있던 이지희를 제치고 상금왕에 올랐다.

이번 대회에서 3위 이내에만 들면 상금랭킹 1위를 차지하는 이지희는 2언더파 70타를 치며 선전했지만 10위(1언더파 287타)에 그쳤다.

시즌 상금 1억2085만4137엔을 기록한 고가는 1억1965만2786엔으로 시즌을 마친 이지희에 120만1351엔을 앞섰다. 만일 최종라운드에서 이지희가 1타를 더 줄였다면 공동 7위에 올라 170만엔 가량의 상금을 더 받고 2013년까지 풀시드를 받는 상금왕에 오를 수 있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전미정(26·진로재팬)이었다.

4라운드 중반 단독 선두로 나섰던 전미정은 17, 18번홀에서 보기와 더블보기로 3타를 잃고 눈앞의 우승을 날려버렸다. 그 바람에 이지희가 눈앞에 있던 시즌 상금왕을 놓치는 유탄을 맞았다. 일본과 고가 미호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남을 역전 명승부이자 미야자키의 기적이지만 이지희와 한국 팬에게는 상상도 못한 미야자키의 비극이었다.

 ‘이지희’라는 이름은 국내 골프팬들에게 낯설다. 국내 투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고, 박세리나 김미현처럼 화려한 선수생활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소리 없이 강했다.

2001년 일본여자프로골프투어에 진출한 이지희는 그해 신인왕에 오르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2년 뒤 2003년에는 상금랭킹 2위에 오르며 무적행진을 펼쳐왔다. 시즌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지희에게 상금왕을 놓쳤던 뒷얘기를 들어보았다.

○“미정아, 너 실수 아니야 … 미안해하지마”

“주변에서 더 난리였어요. 자꾸 그러니까 제가 더 미안하더라고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일본여자골프 상금왕 출신의 베테랑 후도 유리가 그 짧은 퍼트만 놓치지 않았더라도 아니 침착하기로 소문난 전미정이 벙커에서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도 일본여자골프의 상금왕은 이지희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미정이가 저를 보더니 ‘언니, 미안해요’라면서 우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 어찌나 제가 미안하던지, 사실 미정이는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는 친군데 저 때문에 본인도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에요. 자신의 실수 때문에 제가 상금왕을 놓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이제는 오기가 뭔지 알 것 같아요. 조금만 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 미정에게도 말하고 싶어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용면 만족…점점 강해지나봐요”

상금왕은 놓쳤지만 최고의 한해였다.

“아쉬움은 없어요. 계속 생각하면 마음만 아프니까 저도 빨리 잊었어요. 어차피 제 차지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2003년에도 상금랭킹 2위에 오른 적이 있지만 그때는 1위와 격차가 커서 상금왕을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올해는 다르다. 내용면에서도 만족한다. 2승에 불과하지만 메이저대회인 일본여자오픈과 브리지스톤여자오픈 우승으로 상금도 25억원이나 벌었다.

2001년 일본 진출 이후 이지희의 성적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2003년 상금랭킹 2위까지 올랐다가 이듬해 44위로 미끄러졌다. 2005년 8위와 2006년 2위로 다시 순위를 끌어올렸지만 2007년 다시 38위로 뚝 떨어졌다. 기복이 심한 것이 원인이었다.

“작년까지는 기복이 심한 편이었어요. 되는 대회에서는 우승도 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형편없는 성적을 거두기도 했었죠. 하지만 올해는 달라졌어요. 안되더라도 어떡해서든 게임을 풀어가면서 성적을 끌어올리는 대회가 많았어요. 그만큼 성숙해진 것 같아요.”

일본여자골프 시즌 최종전 리코컵은 이지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상금왕을 뺏겼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골프’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대회였다.

“이렇게 해서 점점 더 강해지나 봐요. 제 스스로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다시 알게 됐죠. 다시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않을 거예요. 지켜봐주세요.”

주영로 기자 na1872@donga.com

[관련기사]이지희, 리코컵 고가 역전승에 일본투어 상금왕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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