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웅진신부 어머니 故양육순 여사 15일 발인…각계인사 5000여명 문상

  • 입력 2008년 12월 14일 18시 56분


꽃동네 오웅진 신부와 70여 년간 아들을 위한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 고 양육순 여사. 오 신부는 “나는 어머니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어머니는 내가 갖지 못한 지혜와 유머를 지니신 ‘사랑의 도사’였다”고 추모했다. 사진 제공 꽃동네
꽃동네 오웅진 신부와 70여 년간 아들을 위한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 고 양육순 여사. 오 신부는 “나는 어머니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어머니는 내가 갖지 못한 지혜와 유머를 지니신 ‘사랑의 도사’였다”고 추모했다. 사진 제공 꽃동네
꽃동네 설립자인 오웅진 신부의 어머니 고 양육순여사(89ㆍ세례명 안나)는 성모 마리아가 한 평생 예수를 뒷바라지 한 것처럼, 신부 아들을 위해 잠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던 '기도의 어머니'였다. 330여 명의 신부 수사 수녀들이 자신의 어머니처럼 장례를 거들었고, 닷새 동안 전국각지에서 5000여 명의 문상객이 찾아 왔다. 평소 사망 후 자신의 안구를 세상의 눈 못 보는 사람들을 위해 기증하겠다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별세 직후 안구가 기증됐다.

이명박 대통령, 한승수 국무총리내외, 정진석추기경,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장관, 오명 건국대총장,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정몽구 현대ㆍ기아자동차회장, 김승연 한화그룹회장, 정우택 충북지사, 이기용 충북교육감, 김문수 경기도지사,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 등은 조화를 보내거나 직접 문상을 왔다. 꽃동네에 살고 있는 전 서울역 일대 노숙자 150여 명은 단체로 십시일반 모은 조의금을 보내와 유족들을 뭉클하게 했다. 고인의 유해는 15일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의 집전으로 장례 미사를 드린 뒤 이날 오후 선영에 안장된다.

3ㆍ1 만세 운동이 나던 해인 1919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16세 때 처녀 공출을 피해 충북 청원군 현도면 상삼리 빈농인 오덕만(1957년 작고)씨에게 시집 와 4남 2녀를 낳았다.

시집오기 전 이미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뗄 정도로 총명했던 육순은 3남 웅진을 잉태할 당시 영웅을 제압하는 태몽을 꿨다. 그래서 해방 전 해인 1944년 12개월 만에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영웅 웅(雄)'자에 '진압할 진(鎭)'자를 붙여 '웅진'이라고 지었다.

1957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뜨자 어머니는 손톱이 닳을 정도로 농사를 지었고, 겨울이면 산에 나무를 해다가 20리가량 떨어진 장에 내다 팔며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1958년 어느 날 우연히 나무를 팔고 오다가 종소리에 이끌려 인근 성당에 들어갔다가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얻게 돼 천주교 신자가 됐다. 그러면서도 선대의 제사와 조상의 시제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효부(孝婦)였다.

정치가를 꿈꿨던 아들 웅진은 어머니의 기도에 이끌려 16세 때인 1960년 가톨릭에 입교했다. 1976년 5월 청주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오 신부는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이들의 보금자리인 꽃동네를 창립해 오늘날 4000여 명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사랑의 대부'가 됐다. 꽃동네 식구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 아들은 병석의 모친을 자주 찾아뵙지 못했으나 어머니는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 또 "조상을 잘 섬긴 덕에 43명의 자손을 잘 키웠다"며 늘 제사를 잘 모시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2000년 들어 오신부가 각종 모함과 송사에 시달리기 시작했으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아들의 결백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 신부의 무죄가 입증될 때 까지 결코 내가 눈을 감을 수 없다"며 신부 아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 덕이었을까. 오 신부는 8년 만인 올 해 대법원 최종심에서 형사, 행정, 민사소송 모두 무죄 및 승소판결을 받았다.

비로소 마음이 놓인 어머니는 평소 가고 싶었던 속리산 정2품 소나무를 둘러보고 11월 마지막 시제를 올린 뒤 용돈을 아껴 모아 둔 통장을 막내며느리에게 맡기며 공소(公所)를 짓는데 보태달라는 등 신변정리에 들어갔다. 올 2월부터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서 생활해 온 어머니는 11일 아침에도 묵주기도를 하던 중에 의식을 잃었고, 신부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한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사망 전날 한 밤중에 간호하던 손녀딸이 오 신부에게 연락을 하겠다고 하자 "고단하게 자는 신부를 깨우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고 한다.

오웅진 신부는 "어머니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무슨 일이든 시작을 하면 반드시 끝까지 하라'는 것 이었다"고 회고했다. 때론 '독재자'라는 소리도 듣곤 하는 오 신부의 뚝심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기도 가운데 하느님이 들어주시지 않은 단 한 가지는 "신부 아들의 당뇨병을 낫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기도의 어머니'는 천상에서도 아들과 꽃동네를 위한 기도를 놓지 않으실 것이다.

음성=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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