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년-사랑의 詩]박목월/‘먼 사람에게’

  • 입력 2008년 3월 28일 03시 02분


일러스트레이션=김수진 기자
일러스트레이션=김수진 기자
오늘도 나는 팔을 저으며 거리를 걸어간다. 내 팔은 자동적으로 ‘반원’을 그으며 앞뒤로 흔들린다. 그런데 이 자동적인 동작에 그리움이 어리면, 그리하여 다른 곳에서 팔을 저으며 거리를 걸어갈 먼 당신을 떠올리면, 내 팔의 반원은 사랑의 반쪽을 잃은 슬픈 동선이 된다. 이제 ‘반원’은 단순히 팔의 궤적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사랑의 부재를 실감케 하는 형상이다. 나의 반원은 당신의 반원을 부른다. 먼 사람아.

‘내 팔에 어려오는/그 서운한 반원’에는 반원의 결여가 보랏빛 무지개처럼, 어느새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걸쳐져 있다. 먼 사람아, 그렇게 나는 서운한 결여를 호명으로써 메우는 게 아니라 결여를 존재처럼 확인한다. 당신은 없다. 나의 팔은 당신에게 닿을 수 없다. ‘무지개처럼/나는 팔이/소실한다.’

팔의 반원을 넘어 당신을 부르는 내 손끝에는 ‘연한 채찍’ 같은, ‘울음’ 같은 떨림이 진동하고 있다. 당신의 부재가 진동하고 있다. 해와 달의 순조로운 순환, 자연의 영원하고 완전한 원을 배경으로. 이 배경은 유한한 사랑, 결여의 통각으로 존재감을 얻는 사랑,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에 대비되는 신적인 무한함이자 완전함이다.

그러나 이 무한한 자연과 유한한 인간의 대조가 유한자의 슬픔을 치명적으로 키우거나 허무에 빠뜨리진 않는다. 목월 뒤에 남은 마지막 시집에 따라 말한다면 ‘크고 부드러운 손’ 속에서 나는 울고 있는 것이다. 목월의 연한 울음은 일상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되지 않는 일상을 떨리게 한다. 그리하여 일상은 문득 반짝이고 오늘도 나는 팔을 저으며 거리를 걸어간다.

김행숙 시인·강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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