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세상]남미, 원초적 열정의 나라

  • 입력 2008년 3월 4일 02시 59분


가난도 찬란한, 원색의 황홀

문명의 속도가 부끄러운 곳

20세기의 위대한 물리학자로 꼽히는 리처드 파인먼(1918∼1988)은 시베리아와 몽골 사이 오지에 자리한 소련의 자치공화국 투바에 꼭 가고 싶어했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호기심 천재’인 파인먼의 열정에 불을 댕긴 계기는 수도 키질(kyzyl)의 철자에 모음이 하나도 없다는 엄청난(?) 발견. 1970년대 후반부터 숨지기 전까지 10년간 투바에 가기 위해 친구 랠프와 함께 고군분투하지만 냉전체제의 벽에 가로막혀 꿈을 이루지 못한다. 끝내 그 땅을 밟진 못했어도 투바는 파인먼의 영혼을 사로잡은 곳이었다.

화가 김병종(55)에게는 쿠바가 그랬다. 파인먼과 달리 그는 직접 쿠바를 체험할 수 있었다. 원시적 생명력이 넘치는 카리브 바다, 금세 무너져 내릴 듯한 아바나의 낡은 건물들, 털털거리는 고물차들, 색색의 판잣집들. 이곳에서 만난 원색의 향연은 그에게 벼락같은 충격과 울림을 안겨주었다. 쿠바만이 아니다.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등을 여행하며 마음을 빼앗겼다. “남미는 내게 황홀의 덩어리였고 색채의 교사”라고 고백하는 화가는 그 길에서 부닥친 풍경과 인정에 대한 기억들을 오롯이 화폭 속에 되살려내고자 했다.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과 두가헌에서 12∼26일 열리는 개인전 ‘길 위에서’는 바로 그 추억을 나누는 자리다. 그림마다 눈부시게 밝고 강렬한 색채가 압도한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색깔이 변하는 카리브 해의 청옥색 물빛과 춤추는 물고기 떼, 천진한 아이들, 거리의 행상, 탱고와 삼바를 추는 사람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찬찬을 노래하는 사람들…. 남미의 찬란한 자연과 삶의 풍경은 보는 이의 심장마저 두근거리게 한다.

식민 지배와 군부 독재, 혁명으로 얼룩진 역사, 생활고와 경제난 등 시대의 우울이 나라마다 낙인처럼 고스란히 찍혀 있는 남미. 화가의 눈은 현실을 보면서도 동시에 그 너머, 그리고 사람을 향해 열려 있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는 삶 자체에서/삶을 배웠고/단 한 번의 키스에서 사랑을 배웠으며/사람들과 함께 싸우고/그들의 말을 내 노래 속에 말하며/그들과 더불어 산 거 말고는/ 누구한테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었다’(네루다의 ‘책에 부치는 노래 1’). 억눌린 욕망과 결핍의 나날 속에서도 특유의 낙천성으로 존재에 대한 긍정을 잃지 않는 때묻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화가는 말한다.

콜롬비아 출신의 페르난도 보테로(76). 고전 명작의 틀에 남미의 삶을 슬쩍 접목한, 유머와 냉소가 뒤섞인 그림으로 현대미술 대가의 자리에 올랐다. 지금 서울 강남구 청담동 오페라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작품들을 통해서도 남미의 정서를 가깝게 접할 수 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풍성한 몸매의 인물들. ‘길’(196×117cm·1998년)에 등장하는 남녀도 콜롬비아 어느 골목에서나 마주칠 법한 친근한 이들이다.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은 보테로의 작품에선 남미의 삶과 문화가 서구에 비해 꿀릴 게 없다는 당당한 주장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림들을 보노라면 길 떠나지 않고도 지구 반대편에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영혼을 엿본 듯한 느낌이 든다. 생각해 보면, 마음으로 떠나는 일 자체도 멋진 여정이 될 수 있다. 파인먼의 친구가 투바를 향한 자신들의 분투를 기록한 책 ‘투바-리처드 파인먼의 마지막 여행’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실망이라는 건, 낚시를 하기 전부터 이미 낚시의 목적은 고기를 잡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느끼는 것이라고.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단 한 페이지만을 읽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행이라는 ‘색다른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 증명사진으로 박제된 추억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미래형 마음가짐일 것이다.

“남미에서 나는 질주하는 속도에서 소외된 듯한 느낌에서 놓여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원초적 자연의 빛, 맛, 색깔, 인정…우리는 문명과 속도에 중독돼 조금만 벗어나면 불안해한다. 남미에는 그걸 치유하는 힘이 있다. 못산다는 말은 맞지만 그곳은 경제지표를 뛰어넘는 사람의 냄새가 살아 있는 곳이다.”(김병종)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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