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와 함께 문화산책]파리의 박물관서 쇼팽의 손을 만나다

  • 입력 2007년 10월 26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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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는 이방인의 도시다.

수많은 나라에서 온 예술가들을 위한 묘지와 공원, 박물관이 거리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퐁피두 센터 앞에는 러시아 출신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형상화한 익살맞은 분수가 물을 뿜고 있고, 몽소공원엔 피아니스트이자 위대한 작곡가였던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과 그의 연인 조르주 상드(1804∼1876)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다.》

○ 1838년 클레징어가 석고로 만들어 보존

최근 프랑스 파리로 출장을 다녀왔다. 다음 달 11,12일 내한공연을 가질 예정인 파리 오케스트라를 취재하기 위한 것이었다. 취재를 마친 후 파리 오케스트라의 한 관계자가 “파리 시내에 쇼팽의 손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수많은 귀부인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꽃미남 쇼팽의 손을 볼 수 있다니….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찾아간 그곳은 ‘로맨틱 생활 박물관’이었다. 파스텔톤의 아담한 건물 주변엔 들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이곳은 주로 낭만주의 시대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돼 있는 박물관이었는데, 이 집 본채의 1층엔 쇼팽의 연인이었던 작가 조르주 상드가 쓰던 유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거실을 둘러보다가 발길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가늘고도 길고 새하얀 쇼팽의 손이 있었다. 1838년 쇼팽과 상드와 절친하게 지냈던 오귀스트 클레징어(1814∼1883)가 쇼팽의 손가락을 석고로 떠 놓은 것이었다. 결핵에 걸려 늘 창백했다던 쇼팽이라 저렇게 손이 희었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손이었다. 1838년이면 쇼팽이 상드와 함께 스페인 마요르카 섬에서 요양을 하던 때였다. 당시 쇼팽은 상드의 보살핌 아래 24개의 프렐류드, 폴로네이즈, 발라드, 녹턴 등 수많은 명작을 작곡했다.

○ 명곡을 연주하는 생전의 감동 살아있는 듯

유럽의 박물관이나 예술인이 살던 집에는 ‘데드 마스크’를 심심찮게 만난다. 그러나 죽은 이의 얼굴을 보는 문화에 익숙지 않은 우리에겐 아무래도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쇼팽이 한창 전성기 시절, 사랑하는 연인과 행복했던 시절의 손을 만났을 때의 기분은 정말 남달랐다.

마치 150여 년 전에 죽은 쇼팽의 손가락이 지금이라도 나를 위해 녹턴과 프렐류드를 연주해 줄 것만 같은 황홀경에 휩싸였다.

“쇼팽의 가냘픈 손이 갑자기 피아노 건반의 3분의 1을 뒤덮을 정도로 벌려지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독사가 토끼를 한입에 삼키려고 입을 벌리는 모습 같았다.”(헬러)

“피부의 땀구멍으로 천한 것은 모두 증발된 듯하다.”(알프레도 코르도)

쇼팽의 손가락에 대해선 이렇듯 많은 사람이 기록으로 남겼다. 쇼팽은 불우했던 여타의 작곡가와 달리 생전에 엄청난 인기를 누린 피아니스트였다. 그러나 결핵을 앓던 쇼팽은 음량이 크지 않아 대중 앞에서는 거의 연주를 하지 않았다. 대신 파리 사교계의 살롱에서 자신의 최고 예술적 경지와 거대한 피아노 스케일, 풍부한 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가 1831년 파리에서 데뷔무대를 가진 ‘살 플레옐’은 현재 파리 오케스트라가 상주하고 있으며 한쪽에는 쇼팽의 이름을 딴 연주실이 남아 있다.

‘로맨틱 생활 박물관’의 전시장 안에는 조르주 상드의 석고로 뜬 팔도 전시돼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작가가 팔로만 글을 쓰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피아니스트의 손가락과 같은 느낌은 없었다. 가령 발레리나 강수진의 굳은 살 박인 발가락, 축구선수 박지성의 평발 등 그 사람을 상징하는 몸의 일부분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 요즘도 국내엔 수많은 박물관과 기념관이 생겨나고 있다. 영화제의 ‘핸드프린팅’ 행사처럼 천편일률적인 기념품은 이제 재고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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