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별]가수 조영남의 ‘맹갈이’ 김민기

입력 2007-03-10 02:59수정 2009-09-27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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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갈이’ 김민기 씨와 30년 지기인 가수 조영남 씨. 동아일보 자료 사진
긴 밤 지새운 아침이슬… 그는 한 시대의 ‘금지곡’이었다

나의 별 운운하는 글이 신문에 실렸을 때 가장 화를 낼 친구는 바로 김민기다. 그는 수틀리면 화를 낸다. 나는 그의 어린 아들한테 용돈을 건네줬다가 된통 혼난 적이 있다. 돈 좀 있는 내 친구를 앞세워 화려한 술을 샀다가도 혼난 적 있다. 그가 화를 낼 땐 잠시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가 왜 벼락같이 화내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어설픈 돈 자랑이나 힘자랑을 하는 인간을 싫어한다. 타협할 줄 모른다는 얘기다. 그만큼 바른 결을 타고났다. 나는 이날 이때까지 그처럼 결 좋은 인간을 만나 본 적 없다.

몇 달 전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동숭동에서 만나 뮤지컬 한 편을 보고 큰길가에 있는 학림다방 2층에 올라가 오전 1시(?)경까지 술을 마셨다. 헤어질 때가 되어 강남행 택시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가 아무 말 없이 앞자리에 타는 게 아닌가. 나는 급해서 소리쳤다. “야! 맹갈아(우리는 옛날부터 그를 맹갈이라고 불러 왔다. 그냥 그렇게 불렀다.) 너는 집이 일산 방향이잖아. 나는 지금 강남으로 가는 거야. 너는 길 건너가서 일산 가는 택시를 잡아야지.” 맹갈이가 답했다. “형, 알아, 알아. 그냥 가자고. 내가 강남까지 모셔다 드리고 다시 일산으로 가면 될 것 아냐. 걱정 말라고.” 세상 어느 누가 김맹갈의 고집을 꺾을 수 있으랴. 우리는 그렇게 갔다. 나는 몇 차례 맹갈이에게 물은 적이 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 처음 만났지?”

우리는 첫 만남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내 기억엔 군대생활 막판에 그를 집중적으로 만났던 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 그는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막 내놓은 서울대 미대 2년생이었다. 군부통치 시절이라 장발 파동, 대마초 파동, 금지곡 파동 등 온갖 우스꽝스러운 일로 뒤숭숭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맹갈이와 나를 변함없이 묶어 준 건 다름 아닌 술이었다. 세상에 그자처럼 술을 맛있게 마시는 인간이 또 있을까.

그는 삐쩍 말랐지만 남미 혁명가 체 게바라를 방불케 하는 체력과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세 한번 흐트러지지 않고 3박 4일 논스톱으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나는 그자에게 단 한 번도 술을 적게 마시라는 소리를 해 본 적이 없다.

누가 술 마시지 말라고 해서 안 마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 나는 어차피 술 만 마시다 생을 마감할 녀석, 나중에 괜히 ‘어이구, 살아 있을 때 그렇게 좋아하던 술이나 실컷 사줄걸’ 하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원 없이 술을 사주었다.

내가 미술로 가는 길을 터 준 것도 사실은 김민기였다. 군대 시절 그를 만나러 동숭동 서울대 미대 캠퍼스로 가서 널려 있는 미대생 실습작을 보며 “야, 내가 발가락으로 그려도 이것보다 잘 그리겠다” 했을 때 그자가 ‘우핫핫핫하’ 웃으며 “형이 그려야 해. 우리보다 잘 그릴 거야” 하는 바람에 그때부터 캔버스와 유화물감을 잔뜩 사 가지고 부대에 들어가 짬만 나면 그림을 그려 담았다. 그는 평소에 조용하다가도 한번 냅다 웃으면 그 웃음소리가 임꺽정이나 장길산을 방불케 했다. 나는 늘 그의 티없는 웃음소리에서 한없이 곧은 결을 보곤 했다.

내가 주말 휴가를 나오면 둘이 함께 미아리 근처 내 여자친구 집으로 몰려가 나는 마루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김민기는 기타만 둥둥 쳐 댔다. 온종일 음대생은 그림을 그리고 미대생은 기타를 쳐 댔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자리바꿈이었다.

나는 그가 평생 노숙인으로 살아갈 줄 알았는데 어쩌다 지금은 문화경영자가 되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타고난 예술성에 경영력까지 겸비한 매우 드문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의 탁월한 예술성은 그가 만든 ‘아침이슬’이라는 노래 하나만을 뜯어봐도 알 수 있다. 감히 말하건대 그의 노랫말은 김소월 윤동주 정지용에 손색이 없고 작곡 솜씨 또한 김동진 윤이상에 버금갔다. ‘아침이슬’을 쓴 음률시인이 대학 시절 졸업 학점이 모자라 한 학기 낙제했다는 일화를 윤병로 서울대 미대 교수한테 듣고 한참 웃었던 적이 있다.

내가 군에서 제대한 뒤 생전 처음 미술전시회를 열게 해 준 것도 김민기였다. 그는 일개 미대생에 불과했는데 탁월한 경영력으로 안국동 골목에 있던 ‘한국화랑’을 빌려 아마추어 화가 ‘조영남 전시회’를 열어 주었다. 팸플릿에는 그가 미술평론까지 썼다. 그때의 필명이 ‘김맹ㅱ’이었다.

내가 미국으로 간 뒤 우리의 친교는 편지로 이어졌다. 젊은 날 그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쫓기는 신세로 일관했다. ‘아침이슬’이 화근이었다. 그 노래가 이른바 운동권 주제가로 둔갑하는 바람에 자동으로 찍힌 몸이 되었던 거다. 그때 그가 시골로 내려가 농사도 짓고 야학도 하고 빵공장에 취직한 걸 편지로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편지가 끊겼다. 나는 7년 뒤 귀국하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소식이 끊긴 친구를 위한 노래를 하나 지었다. 외국 곡에 가사를 붙였는데 ‘김 군에 관한 추억’이라는 노래다. 그때 마침 김민기가 고생고생하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아 추모가를 만들었던 거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그는 멀쩡했다. 그 노래는 사장됐고 그로부터 20여 년 뒤 내 가수 생활 ‘30주년 기념음악회’ 무대에서 공개되었다. 관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20여 년 만에 그 노래를 불렀다. “여러분! 제 친구 김민기가 죽었다 치고 노랠 들어 주십시오.” 그날 밤에도 우리는 오전 4시까지 술을 퍼마셨다. 그의 웃음소리와 심성의 결도 여전했고 술 마시는 솜씨도 여전했다.

조영남 가수

■ “내 추모곡까지 썼던 영남이 형… 이번엔 또 뭘 썼어요?”

癰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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