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오, 마이 갓!” 2006 이건 지워버리고 싶어

입력 2006-12-30 03:00수정 2009-10-0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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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큼 창피한 일이 있었고,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의 벽에 부닥쳐 울고 싶어지는 경험도 했습니다.

‘내 머리속에 지우개가 있다면…’. 홍보대행사 ‘피알원’ 직원 100여 명은 사내 통신망을 통해 올 한 해 각자의 기억 속에서 말끔히 지워버리고 싶은 사연을 모았습니다.

어찌 피알원 직원만의 얘기이겠습니까. 그들의 기억은 어쩌면 ‘2006년 대한민국’을 숨가쁘게 살았던 모든 직장인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좌충우돌. 실수도 많았지만 일과 사랑으로 뜨거웠던 한해였습니다. 피알원 직원들이 겪은 ‘그 때 그 사건’과 뒷이야기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2006년을 짚어봅니다.》

어느기업의 인트라넷을 통해 본 잊고싶은 사연

○ 살다 보니…

취업난과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일터를 옮기는 이직(移職)은 이제 직장인들에게 낯익은 풍경이 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9월 기준 20대 청년실업률은 7.2%로 전체 실업률(3.2%)보다 훨씬 높았다. 구직자 3명 중 1명은 취업의 좁은 문을 뚫기 위해 어학과 실무 분야의 ‘사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우석(29) 씨

3월에 입사해 새 직장에 빨리 적응하겠다는 일념으로 거의 매일 야근을 했습니다. 출퇴근에 들어가는 시간을 아끼려고 회사 근처 사우나에서 잠을 잔 날도 적지 않았죠. 하지만 아들의 회사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부모님은 제가 제대로 직장에 다니기는 하는 건지 걱정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오전 1시가 넘어 대화가 시작됩니다.

“우석아! 오늘은 탁 터놓고 얘기해 보자.”

“예?”

“너 스크린 경마장 다니지?”

“네?”

“한 번 빠지면 나오기 힘든 것 다 이해해. 빚 갚아줄 테니 새로 시작하자. 그게 부모자식 사이가 좋다는 거 아니겠니.”

→ 지우고 싶은 기억인지, 남기고 싶은 기억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부모님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동아일보에 제 얼굴이 나가 부모님 의심을 한꺼번에 지웠으면 합니다.

▽조수연(31) 팀장

추석 연휴 직후 면접이 있었습니다. 혹시 얼굴에 뾰루지라도 날까, 눈병이라도 생길까 싶어 연휴 내내 집을 벗어나지 않았지요. 면접 전날 밤 샤워를 하려고 수도꼭지를 트는 순간 찬물이 확 쏟아지더군요. 놀라서 피하다 중간의 수도 밸브에 부딪혀 왼쪽 눈썹 앞부분이 찢어졌습니다. 바로 병원으로 가 꿰맸습니다. 의사는 눈썹 모근이 없어져 눈썹이 안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 눈썹보다는 면접 걱정이 앞섰습니다. 사랑니 수술의 후유증으로 오른쪽 얼굴에 멍이 있었거든요. 왼쪽 눈썹에는 밴드가 찍∼, 오른쪽 볼에는 시퍼런 멍. 거울을 보니 ‘여자 깡패’가 따로 없더군요. 그래도 입사했습니다. 다행히 눈썹도 나고 있고요. 아직 상처가 ‘쬐끔’ 보이지만^^.

▽곽동원(30) 팀장

이런 걸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나요? 장대비가 쏟아지던 8월 어느 날, 강남 지하철역 근처에서 오후 7시 저녁식사 약속을 했습니다. 퇴근길 교통정체를 예상해 오후 5시 반쯤 서대문 사무실을 나섰지요.

버스를 탔지만 30분이 지나도 광화문을 통과할 기미가 없더군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가 있다는 버스운전사의 말을 듣고 서둘러 내려 광화문에서 종로3가까지 비를 맞으며 걸었습니다. 지하철역에 도착하니 침수로 운행이 중단됐다고 하더군요. ‘오늘 정말 재수 없는 날이네’ 하면서 종로2가에서 광역 버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버스는 한남대교를 건넌 뒤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더니 계속 달리더군요. 분당에 들어서자마자 첫 번째 정류소에서 내렸는데 이건 또 무슨 일입니까. 그야말로 허허벌판에 제가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허허.

→나중에 알고 보니 판교 신도시 건설 예정지더군요. 저는 버스만 타다 오후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습니다.

▽임정묵(26) 씨

저는 눈이 좀 안 좋지만 안경 끼는 것이 싫어 그냥 살아갑니다. ○○백화점에서 여자친구와 쇼핑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배에서 ‘신호음’이 오더군요. 화장실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침착한 목소리로 “네, 그날 인터뷰하면 된다고요? 감사합니다”하고 말했지요. 이때 화장실 밖에서 들려오는 뭇 여성들의 수근거림…. 오 마이 갓!

→잠시 후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봐요. 거기 아저씨, 그만 나와서 같이 가시죠.”

무어라 답할지 0.4초 정도 고민한 저는 “아직 일이 안 끝났다”고 했습니다. 밖에서는 “어머 저 변태, 안에서 ‘몰카’ 찍은 거 아냐”라고 하더군요. 5분 뒤 자포자기 상태에서 나갔더니 아저씨와 여성 몇 명이 서 있더군요. 휴대전화를 뺏기고 사무실로 끌려갔습니다. 여자친구가 해명해 준 덕택에 간신히 풀려났지요. 제발 화장실 그림 좀 크게 그려 주세요!

○ 마시다 보니…

서울시가 지난해 직장인 312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음주실태 조사에 따르면 42.6%가 ‘필름이 끊긴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 응답자의 35.2%, 여성의 21.4%는 음주 후 숙취 등으로 정상적인 생활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답했다. 불행하게도 연말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술자리’가 됐다.

▽문○○ 팀장

저는 술을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블랙아웃’ 환자입니다. 얼마 전 술을 마신 뒤 서대문소방서 문을 두드리다 쓰러졌습니다. 곧 119 차량에 실려 강북삼성병원으로 후송됐지요. 응급실 침대에서 뒤척이다 떨어졌는데 간호사들의 ‘호들갑’ 덕분에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을 했습니다.

→새벽 5시경에 귀가했습니다. 오후에 정신을 차린 뒤 잃어버린 안경을 찾으러 응급실에 다시 갔습니다. 머리가 조금 아프다고 하자 의사 선생님은 MRI를 또 찍으라고 하더군요. 돌이켜보면 숙취였는데…. 결국 1박 2일 동안 술 때문에 MRI를 두 번이나 찍었습니다. 물론 이 내용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재구성한 것입니다.

▽박주연(28) 씨

올해 봄 회식을 마친 뒤 일어난 일입니다. 제 술버릇이 취하면 도망가기인데 하필 그날은 택시를 타고 대책 없이 ‘압구정동’을 외쳤어요. 며칠 전 ‘소개팅’에서 만났던 그에게 ‘그쪽으로 간다’는 메시지를 보낸 뒤 택시에서 정신을 잃은 겁니다. 다음 날 눈을 뜨니 화장도 지우지 않은 채 제 침대에 누워있더군요. 휴대전화 통화 목록에는 ‘소개팅 남(男)’과의 수많은 통화 기록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기록은 택시운전사 아저씨와 그의 통화였습니다. 그가 아저씨에게 집 위치를 알려줘 무사히 도착한 겁니다. 그 사건 뒤 저는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게 됐고, 지금은 막역한 ‘오빠 동생’ 사이가 됐습니다.

▽이미경(32) 과장

저희 가족은 술을 전혀 못 마시지만 고기는 좋아합니다. 친구가 주말에 중요한 일 때문에 전화를 했는데 연결이 되지 않자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현관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어 살짝 귀를 대고 있자니 안에서 끙끙 앓는 소리만 들리더랍니다. 다급해진 친구는 119를 불러 문까지 뜯고 들어왔습니다. 거실에는 뭔가에 중독된 듯 처절하게 나뒹군 상태에서 눈까지 풀려 있는 저희 가족이 있었습니다.

→친구는 독극물 중독을 의심해 약병이나 독이 될만한 것을 찾았답니다. 하지만 발견된 것은 거실 구석에 있는 맥주병 하나였죠. 저희 가족은 그 맥주를 나눠 마시고 쓰러져 ‘사경’을 헤맸던 겁니다. 그날 놀라서 링거까지 맞은 친구는 지금도 저에게 술은 입에도 대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 당부, 아주 지겨워요.

○ 사랑하다 보니…

‘쌍춘년’ 열풍은 직장 여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광주웨딩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성탄절 연휴는 물론 올해의 막바지인 30, 31일에도 ‘막차’를 타려는 커플로 예식장 예약이 쉽지 않다.

▽박은정(26) 씨

남자친구의 생일날. 그 친구가 불편해 하는 다른 남성을 만난 뒤 말을 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죠.

남자친구에게 사과한 저는 사당역 부근으로 자리를 옮겨 매화주를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그는 제가 취해 누군가의 전화를 받다 ‘헤매는’ 것을 보더니 “헤어지자”며 눈물을 글썽이면서 술집을 나갔습니다.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습니다. 인파로 북적이던 여름날 금요일 밤의 사당역 앞에서 고운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 길거리 땅바닥에 주저앉아 한 남자의 허벅지를 부여잡고 눈물, 콧물, 침까지 흘리며 울었습니다. 급기야 제가 울다 실신하자 남자는 ‘걱정 모드’로 바뀌어 집으로 이송했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사당역 근처에도 안갑니다.

▽김가원(24) 씨

올해 7월 19일은 24번째 생일이었습니다. 막 연애를 시작한 ‘남친’과 분위기 좋은 삼청동에서 식사한 뒤 산책을 했습니다. 저는 2차로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을 듣고 실망한 채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마다 촛불이 켜져 있고, 그 위에는 그가 손수 만든 케이크와 풍선 장식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앞으로 그를 완전히 사랑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양주 한 병을 통째로 비운 뒤 속에 들어있던 ‘모든 것’을 여과 없이 보여줬습니다. 옥탑방 마당에서 이물질을 치우느라 미친 듯 뛰어다닌 것은 제몫이었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와 저는 아직도 열렬히 사랑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만 더 깊은 속을 보여주면 그때는 안면몰수할 겁니다.

글=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사진=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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