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해 7만2000명 고려인 凍土에서 스러져”

  • 입력 2006년 10월 2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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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소련 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에 참석한 미하일 김 씨(앞줄 가운데). 뒷줄 오른쪽에 스탈린이 보인다. 사진 제공 데카브리나 김 씨
1934년 소련 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에 참석한 미하일 김 씨(앞줄 가운데). 뒷줄 오른쪽에 스탈린이 보인다. 사진 제공 데카브리나 김 씨
근 70년 전인 1937년 9월. 러시아 동부 블라디보스토크에 살던 어린 소녀 데카브리나의 집에 소련 비밀경찰(NKVD) 2명이 들이닥쳤다. 이틀의 시간을 줄 테니 짐을 싸서 떠나라는 통보였다. 데카브리나의 아버지 미하일 김(당시 41세) 씨는 아무르 강 파르티잔 부대 대장 출신으로 당시 지역 공산당의 최고위 간부였다. 김 씨는 비밀경찰에 끌려갔고, 가정부를 포함한 나머지 가족들은 화물열차에 실려 6400km가량 떨어진 카자흐스탄 아크투빈스크 지방의 벌판에 내팽개쳐졌다.

“스탈린이 한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기 전까지 우리 집에는 항상 손님이 넘쳤지요. 대부분 하얀 옷을 입은 고려인들이었는데 고모는 그들을 ‘레베디(백조)’라고 불렀어요. 하지만 (지역) 당내 서열 3위 간부였던 아버지는 일본의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2년 후 처형됐어요.”

현재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살고 있는 전직 내과 의사인 데카브리나 김(80) 씨가 최근 미국 미시간대 한국문제연구소의 우정은(정치학)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에 전한 70년 전의 기억들이다. 우 교수와 저명한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이 대학 예술·디자인학과 조교수인 데이비드 정 씨는 최근 3년간 수차례의 현지답사를 통해 고려인 강제 이주의 진실을 복원해 냈다. 연구팀은 수백 명의 생존자를 만나 당시의 기억을 듣고 사진과 문헌들을 수집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18만 명에 이르렀던 연해주, 하바롭스크 일대 한인들은 거의 한 명도 남김없이 중앙아시아 미개척지에 버려졌다. 이주를 거부하면 처형됐다.

집단농장에서 일하다 은퇴했다는 세르게이 윤 씨는 “열차의 가축 수송칸에 타고 카자흐스탄의 황무지까지 실려 가는 도중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시신은 기차 밖으로 버려졌다. 당시 사람들은 고려인 수송 열차를 ‘귀신열차’라 불렀다”고 회고했다.

우 교수팀의 조사와 중앙아시아 민족문제 연구의 권위자인 카자흐국립대 저먼 김 교수에 따르면 당시 고려인 강제 이주는 스탈린의 ‘인종 청소’ 명령에 따른 첫 작업으로 이뤄졌다. 스탈린이 한인을 첫 이주 대상으로 정한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스탈린은 일본이 소련의 ‘후방’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경계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경우 한인들이 일본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둘째, 1930년대 초반 대기근과 집단농장 정책의 실패로 카자흐스탄에서 130만 명이 굶어죽고 170만 명이 중국 등으로 도주하자 땅을 개간할 사람이 거의 없이 방치된 상태여서 한인들을 이주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1937년 8월 소련의 인민위원회와 공산당은 ‘극동지방 국경 부근의 한인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관하여’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우 교수는 “미하일 김 씨를 비롯한 소련 공산당 한인 고위 간부들이 처형당하지 않았더라면 소련이 북한 정권을 말단 장교인 김일성이 아니라 모스크바와 관계했던 한인 간부들에게 맡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일제 강점과 기근 등 타의에 의해 해외로 떠난 한인들의 역사도 한국사의 주요 대목으로 조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 교수팀은 답사 결과를 토대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고려사람-못 믿을 민족’(스탈린의 시각)을 29일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새클러 갤러리에서 처음 상영한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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