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코프의 북한이야기]무늬만 남녀평등

  • 입력 2004년 12월 27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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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만큼 여성의 해방과 독립을 지지한 사상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성별에 의한 차별을 비난했고 여성의 정치 참여를 지지했다.

초기 공산국가에서 고위급 정치인으로 활동한 여성들이 적지 않다. 한국에서 ‘붉은 사랑’의 저자로 유명한 소련의 여성 정치인 콜론타이는 장관을 지내고 1924년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대사(노르웨이 주재)가 됐다. 1945년 루마니아에서는 아나 파유켈이 외무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공산권 국가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가부장적인 체제를 지지하게 됐다. 특히 공산주의 정권이 국제주의에서 민족주의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가치관, 즉 남성 중심 가치관에 의존하게 됐다.

그 결과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서 여성 선장이나 여성 비행사 등이 ‘선전용’으로 많이 이용되기는 했지만 실제로 여성이 출세하기는 어려웠다. 공식 제한은 없지만 여성이 일정한 수준 이상 올라가지 못하는 ‘유리 천장(glass ceiling system)’은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더욱 강력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중급 이하의 직책에는 남녀평등이 있었으나 관리 구조에서 높이 올라갈수록 여성의 얼굴을 보기 힘든 것이다.

북한도 남성중심주의가 강하다. 1946년 남녀평등을 법으로 확인한 북한은 당초에는 여성 해방 면에서 남한보다 앞섰다. 많은 여성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자유와 권리를 받았고 정치 쪽에서도 몇몇 여성 정치인이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은 박정애(1907∼ ? )와 허정숙(1902∼1991)이다. 허정숙은 사회주의 운동가 허헌의 딸이다. 소련 교포 출신인 박정애(본명 최베라)는 1930년대 초에 코민테른 공작원으로 조선에 와서 적색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던 혁명가다.

그러나 이 두 여성 실력자는 오래가지 못했다. 박정애는 1953년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됐는데, 이는 당시 북한의 권력서열 5위 안에 드는 지위다. 하지만 김일성은 1960년대 말, 과거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들을 숙청할 때 박정애도 요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박정애보다 좀 실권이 약했던 허정숙은 문화선전상과 사법상을 지냈으나 1960년대에 숙청됐다. 1970년대에 다시 정치로 돌아왔으나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자리만 맡았다.

박정애, 허정숙 이후에 고위급으로 진출한 여성들은 김일성의 처인 김성애,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 등 모두 김일성 가족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정치 참여는 남녀평등보다 세습정치를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중에 여성이 많지만 공산당이 임명하는 것이고 권한이래야 선전선동만 할 수 있는 정도다.

가부장적인 상황은 서민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여성이 직장과 가사의 이중부담을 지는 경우가 많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점차 확대되는 시장 자본주의가 여성의 역할 확대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식량 위기 때 굶주린 가족을 구하러 시장이나 개인 사업으로 나간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북한 지하 자본주의의 선봉에 선 사람들의 다수가 여성인 것이다. 원인이 어쨌든 여성들의 경제력이 커지고 있다는 얘기이니, 나중에는 이들의 사회 정치적인 힘도 얼마나 커질지 두고 볼 일이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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