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DS편견의 벽을 깨자]<下>죽음보다 꺼리는 신분노출

입력 2003-12-01 18:28수정 2009-09-28 04:32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50대 주부 A씨는 올해 초 직장에 다니는 딸(29)의 고백을 듣고 아연실색했다.

딸은 5년 전 남자친구와 관계를 맺고 에이즈에 감염됐다. 딸은 이 사실을 부모는 물론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지난해 한 친구가 우연히 알아버렸다. 그 친구는 “너희 엄마에게 이르겠다”며 협박해 온갖 선물을 요구했고 딸의 카드빚은 3000만원이 넘었다.

▼관련기사▼
-<上>에이즈 가족의 눈물

A씨가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자 딸은 “우리 가족 모두가 남한테 손가락질 받는 것이 무서웠다”고 울먹였다.

국내의 에이즈 환자들은 사회의 싸늘한 시선과 부당한 대우 때문에 응달 속으로 몸을 숨긴 채 살며 고통을 겪고 있다.

대한에이즈예방협회가 올해 서울에 사는 에이즈 감염인 253명을 대상으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37%(93명)가 ‘신분 노출’이라고 대답했다. 경제적 곤란(29%)이나 건강 악화(27%)보다도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더 겁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에서 10년 가까이 에이즈 환자를 돌보고 있는 외국인 수녀 K씨는 “한국인은 누구나 에이즈에 걸릴 수 있는 성 문화를 갖고 있으면서도 에이즈 환자에게 상처를 주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때문에 억울하게 에이즈에 걸린 사람도 죄인처럼 발병 사실을 숨겨야만 한다. 혈우병에 걸려 혈액제제를 투여받았다가 에이즈에 걸린 환자도 마찬가지다.

쉬쉬하는 분위기는 한 가족을 평생 가슴 졸이게 만든다.

C씨(32·여)는 남편과 5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했는데 이듬해 남편은 신체검사를 통해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알게 됐다. 한동안 C씨는 주위에서 ‘왜 아이를 갖지 않느냐’고 다그칠 때마다 죄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는 세월을 보냈다. 솔직하게 이유를 대면 당장 이혼하라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

그러나 남편을 사랑한 C씨는 예방 차원에서 에이즈약을 복용한 채 관계를 가져 아기를 낳았고 다행히 산모와 아기 모두 감염되지 않았다. 이제 C씨는 나중에 아기가 아빠의 감염 사실을 알까봐 걱정하고 있다.

에이즈 환자를 근거 없이 배척하는 것은 가족구성원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서울대 의대 감염내과 오명돈(吳明燉) 교수는 “부모는 대부분 에이즈에 걸린 자식을 헌신적으로 간호하지만 자녀는 에이즈에 감염된 부모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에이즈 감염인이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 음지로 숨을수록 에이즈가 확산될 가능성은 오히려 커진다.

오 교수는 “최근 남성 감염인 중에 성병에 걸려 병원을 찾는 이가 늘고 있다”며 “이것은 에이즈가 음성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최근 한국에이즈퇴치연맹과 서울보건대학원의 조사에 따르면 지적 수준이 낮고 에이즈에 대해 모를수록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K수녀는 “침묵은 에이즈 바이러스를 행복하게 할 뿐”이라며 “정부와 언론은 하루빨리 응달에 있는 에이즈 문제를 양지로 끌어올려 공론화하고 예방책과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