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38>"세상 은혜 다 못갚고 가는구나"

  • 입력 2003년 11월 27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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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세게(辭世偈)

출가해 은사로 모시던 청화(淸華) 스님이 열반에 드셨다. 살아 생을 쫓지 않고 죽되 죽음을 쫓지 않는 선승의 자취는 다비장의 불꽃처럼 가볍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다.

이 세상 저 세상을 오고 감을 상관치 않으나 다만 큰 은혜를 다 갚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못내 한스러울 뿐이라는 그의 게송은 남아있는 이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게송을 임종게라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구태여 ‘세상을 버린다’는 뜻의 사세게(辭世偈)라고 이름 지어 후학들에게 건넸다. 그것은 시간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떠난다는 선승의 높은 기개를 내보인 것이 분명하다. 그의 임종에는 어떠한 집착이나 두려움의 흔적이 없었다. 다른 시간을 향해 떠나는 존재의 머뭇거림 또한 없었다. 자유로운 것이다. 오고 감에 걸리지 않는 큰 존재의 자유로움을 그는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스승의 다비 앞에서 큰 사람은 삶을 크게 쓰고 작은 사람은 삶을 작게 쓴다는 가르침 하나를 보았다. 나는 스승의 열반 앞에서 비로소 스승을 만난 것이다. 스승의 열반은 그가 내게 거울과 같은 존재였음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스승의 삶을 통해서 내 삶의 작음을 본다. 삶에도 죽음에도 상관치 않는 큰 삶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보고, 나누고 나누어도 모자란다는 스승의 자비 앞에서 끊임없이 갖고자 하는 내 부질없는 욕망을 본다. 거울을 닦듯 스승의 삶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면 내 작고도 볼품없는 존재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돼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한 줄기 불꽃으로 사라져 가는 스승의 마지막 모습에 올리는 추모의 마음은 어쩌면 내 작은 삶의 참회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은혜를 다 갚지 못했다는 스승의 고백은 내게 삶의 진정한 의미에 눈뜨라고 말하고 있다.

불꽃이 타오를 때마다 스승의 육신의 자취는 사라져 갔다. 그러나 스승이 남긴 사세게는 불꽃보다 아름답게 타올라 내 마음에 불을 지핀다. 따뜻한 나눔의 불, 나는 그 불을 오랫동안 내 가슴에 소중하게 안고 살아가고만 싶다.

성전 스님 월간 해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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