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쉿! 스파이의 세계…화이트와 블랙 사이

입력 2003-11-20 16:25수정 2009-10-10 08:28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동아일보 그래픽자료

남북한이 더 많은 수교국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1970년대 중반. 중동의 한 사막을 동양 남성이 홀로 걷고 있었다. 사막에서 며칠을 보냈는지 모른다. 지친 몰골의 이 남성은 국경을 넘어 인접국으로 들어서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당시 한국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중동의 미수교국에 은밀히 파견한 해외 정보요원이었다. 첩보 수집활동을 하던 이 요원은 그 나라 방첩기관에 포착돼 쫓기자 사막으로 도망쳐 국경을 탈출한 것이다. 그는 스파이였다.

올 7월부터 미국 정계는 한 중앙정보국(CIA) 요원의 신분 노출 문제로 떠들썩하다.

이라크전쟁의 명분 논란에서 궁지에 몰린 백악관측이 전 가봉 주재 미국대사의 부인인 발레리 플레임이 CIA 해외요원이었다는 정보를 흘렸던 것. 문제의 대사는 지난해 이라크가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핵폭탄 제작에 쓰일 우라늄을 수입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음을 보고했다가 묵살당했다고 7월 폭로했다. 미국은 이라크가 우라늄을 수입해 핵무기를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며 3월 이라크전쟁을 시작했었다.

백악관측이 가봉대사 부인의 신분을 흘린 것은 세간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그 주장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또 이 같은 폭로행위의 재발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일부 언론은 보고 있다.

미 언론과 민주당은 백악관이 해외 정보요원의 신분을 노출해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중대한 법률 위반을 했다고 공격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곧 수사에 들어갔다.

치열한 국가 경쟁 속에서 자국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 공식 스파이 ‘화이트’

한 국가의 정보기관이 해외에 파견하는 스파이는 크게 ‘화이트’와 ‘블랙’으로 나뉜다.

화이트는 공식적인 스파이다. 이들은 상대국가의 정보기관에 신상을 다 드러낸 채 파견된다. 각 군이 대사관에 보내는 무관이나 국정원의 파견관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은 외교관 신분을 갖는다. 공식적인 신분이 있기 때문에 미국이나 서양에서는 ‘OC(official cover)’ 또는 ‘오버트(overt·‘명백한’이라는 뜻)’라고도 불린다. 합법적 스파이인 셈이다.

합법적인 반면에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주재국 방첩기관에 상세하게 포착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이 주재국 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첩보활동을 할 때는 간첩혐의를 받을 위험에 부닥치게 된다. 화이트는 불법 첩보행위를 하다 적발되면 기소돼 재판정에 서지 않고 추방되거나 본국으로 송환된다.

96년 로버트 김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주미 대사관에 해군 무관으로 파견된 백동일 대령은 미 해군성 정보국(ONI)에서 문관으로 일하던 로버트 김에게서 북한 관련 기밀 정보를 받다 FBI에 발각됐다.

백 대령은 미 정부에 의해 ‘기피인물(persona non grata)’로 찍혀 한국으로 송환됐고 로버트 김은 지금까지 복역 중이다.

98년에는 러시아 주재 한국대사관의 조성우 참사관이 역시 기피인물로 통보받고 한국으로 송환됐다. 조 참사관은 국정원이 파견한 화이트였는데 러시아 외교관에게 돈을 주고 북한의 무기 수입에 관한 정보를 받은 혐의였다.

● 살얼음판 위의 ‘블랙’

블랙은 상대국의 정보기관에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스파이다. 즉 대사관 등 외교 공관을 통하지 않고 들어가는 요원이다. 따라서 외교관 신분이 아닌 위장된 직업인으로 행세하면서 첩보 활동을 펼친다.

공식 신분이 없기 때문에 ‘NOC(Non-official Cover)’ 또는 ‘코버트(covert·‘은밀한’이라는 뜻)’라고 불린다. 불법적인 스파이인 셈이다. 상대국 법의 한계를 넘는 첩보활동을 하다 적발되면 간첩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는다. 파견한 국가는 ‘자국의 정보원’임을 부인한다.

블랙은 기업가, 관광객, 언론인 등으로 가장한다. 한국은 과거 상사 주재원이나 태권도 사범 등으로 위장해 블랙을 파견했다.

전 국정원 요원이었던 A씨는 블랙의 삶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다”고 말했다.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블랙이라 해도 1, 2년 머물다 보면 상대국 방첩기관의 정보망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는 것. 집이 언제 도청당할지 몰라 항상 긴장하게 되고 첩보 수집에 필요한 사람을 만날 때도 차를 몰고 한적한 교외로 나가 인적이 없는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차에도 도청 장치가 부착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블랙은 화이트처럼 정기적인 첩보 보고를 하지 않는다. 특정한 목적을 갖고 잠입하기 때문이다. 그 수도 화이트에 비해 아주 적다. 한번 블랙으로 들어간 국가에 다시 파견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A씨는 국정원에서 파견하는 블랙은 활동 범위가 그리 넓지 못하다고 말한다. 먼저 생김새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서양에서 첩보활동을 하는 데 제약이 따른다. 또 선진국에서 그 나라 사람으로 에이전트를 만드는 데는 돈이 많이 든다는 것. 상대적으로 생김새가 비슷한 중국에서는 블랙들의 활동이 용이한 편이다.

A씨에 따르면 과거 블랙으로 활동하다 간첩혐의로 체포돼 옥살이를 하고 귀국한 요원들도 있었다.

● 신분노출을 막아라

블랙의 신분이 노출된다는 것은 스파이로서의 생명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노출된 요원의 정보는 각국의 정보기관에 바로 수집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요원이 속한 국가의 정보기관에는 엄청난 유형무형의 손실을 입힌다.

미 언론들은 이번에 백악관이 신분을 노출시킨 CIA 요원 발레리 플래임이 블랙으로 활동하기까지 수십억원의 비용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플레임은 중동지역에서 ‘브루스터-제닝스 앤드 어소시에이트’라는 에너지 관련 컨설팅 회사의 에너지 분석관으로 활약했다. 이 회사는 CIA가 만들어낸 위장 회사로 ‘프런트(front)’라고 불린다. 2002년 회계기록을 보면 연매출이 6만달러(약 6700만원)에 불과하다. 여기에 ‘레전드(legends·전설)’라고 불리는, 요원의 과거 경력을 지어내야 한다. 가짜 대학 졸업장, 가짜 면허증은 물론이고 각종 학위와 경험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단지 비용 문제뿐만이 아니다.

미 CIA 전문가들은 ‘브루스터-제닝스’라는 회사 직원으로 활동했을 모든 요원들의 안전이 큰 위험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또 이 사실을 모르고 플레임에게 정보를 건넸던 소스들은 자신이 CIA와 거래했음을 알았을 것이고, 플레임이 포섭한 에이전트들은 두려워하며 잠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플레임이 몇 년간 공들여 쌓아 놓은 첩보 네트워크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한국에서도 98년 국정원의 대북 공작과 관련한 활동이 기록된 세칭 ‘이대성 파일’이 공개되면서 한 공작원의 신분이 그대로 노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공작원을 고용해 대북사업을 추진했던 한 업체는 그의 정체가 드러나 사업에 피해를 봤다며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 6월 일부 승소판결을 받았다.

정보 전문가들은 이 두 사건 모두 정보가 정치에 종속될 때 일어났다고 지적한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