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폭력논란 부른 '킬빌' 전문가의 찬반 양론

  • 입력 2003년 11월 18일 17시 42분


코멘트
《쿠엔틴 타란티노가 신작 ‘킬빌 Vol.1’(21일 개봉)과 함께 돌아왔다. 그의 작품들은 마니아층의 열광에도 불구하고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지만 ‘킬빌’은 유일하게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1위에 올랐다. 이 작품은 국내 심의과정에서 한 차례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으나 수입사가 일부 장면을 삭제한 끝에 ‘18세 이상 관람가’로 결정됐다. 이에 대해 젊은 영화인들은 18일 사실상 검열이라며 영상물등급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화제작 ‘킬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영화평론가 심영섭씨와 조희문 상명대 교수의 양론(兩論)을 들어본다. 》

●이래서 좋다

우유 맛을 알려면 상한 우유를 많이 마셔 봐야 한다. 미국의 대표적 공포 소설가인 스티븐 킹이 한 말이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킬빌’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이 상한 B급 영화, 특히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어릴 때부터 ‘마셔 댔는지’ 마음껏 뽐낸다.

그러나 제발 오마주를 떡칠한 모작이라는 둥, 창조력 부재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상 증후 운운은 하지 말아 달라. ‘킬빌’이 B급 영화의 수혈을 받았다며 동네방네 자랑하는 ‘똘마니’ 감독들과 아주 다른 이유 중 하나는, 타란티노가 그 자신도 킬킬거리고 볼 만큼 영화를 재미있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킬빌’은 심지어 우마 서먼이 입고 나온 노란색 체육복이 리샤오룽(李小龍)이 ‘사망유희’에서 입고 나온 것과 똑같은 쫄바지라는 것을 몰라도 영화에 푹 빠져 들 수 있다. ‘킬빌’은 눈 쌓인 정원에서 딸깍거리는 수통 소리 하나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긴장감에 오금이 저리는 그런 영화이다.

놀라운 것은 그러면서도 타란티노가 인간의 어떤 정념이나 영혼에 대한 정수를 짚을 줄 안다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부비 트랩처럼 깔려있는 지뢰밭 같은 상황에서 타란티노의 인물들은 가장 노골적인 생생한 캐릭터를 드러낸다. ‘킬빌’의 매혹 또한 그것이다. 얼굴이 망가진 신부였던 브라이드(우마 서먼)가 머리에 총구멍이 난 채 4년 만에 깨어나자 뱃속에 든 아이는 없어진다. 그녀는 살모사라 불렸던 전직 킬러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다가도 살모사의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칼을 등 뒤에 숨긴다.

그녀가 울부짖을 때 우리는 ‘복수의 염(念)’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순수한 분노가 거꾸로 ‘킬빌’의 결투를 ‘예스럽게’ 만든다. ‘킬빌’에서의 모든 싸움은 일종의 결투이고, 품어내는 피와 으스러지는 육체가 주는 쾌감에 몸을 맡겨도 잔인해지지 않을 수 있다. ‘헤모글로빈의 성찬식’이 이어지는 영화 ‘킬빌’은 근자에 드물게 스타일리시하고, 잔혹하지만 아름답다. 진정 타란티노는 B급 영화의 성자인가. 그의 바느질 솜씨는 너무나 기가 막혀 누더기를 기워내도 이음매 없는 비단이 만들어진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이래서 싫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판타지다. 현실처럼 보이는 소재를 빌려 쓰지만 영화가 그리는 내용이 현실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총알이 날고 사람이 떼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도 편안히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단지 ‘영화’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킬빌’도 여느 경우와 다를 바 없는 영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르다면 보통 영화들이 그리는 수준 이상의 폭력과 잔혹함이 난무한다는 점이다.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 ‘펄프 픽션’ 같은 영화들을 통해 형식의 발랄함과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사회적 통찰을 엽기적으로 버무려 냄으로써 기성세대들이 유지해왔던 근엄함의 전통을 뿌리째 흔들며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알렸다. 그는 ‘킬빌’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이전의 영화들에서도 피와 폭력으로 화면을 적시다시피 한 그였지만 ‘킬빌’에서는 난도질을 치고 또 친다. 잘려 나간 팔, 다리, 머리가 이리저리 뒹구는 사이 사람은 장난감이 되고, 폭력은 영화 주인공들의 이미지를 포장하는 드레스가 될 뿐이다. 어떤 고민이나 주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로지 더 멋있게, 더 잔혹하게 그리는 것이 최대의 목표라고 외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장면들에서 겹쳐 보이는 것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히죽거리며 사람 몸을 칼로 찢고 있는 것 같은 타란티노의 얼굴이다. 칼이 살을 벨 때의 촉감과 절명의 순간에서 솟구치는 피, 단말마의 비명을 음미하는 사무라이 마니아의 모습이다.

영화는 분명 현실이 아니지만 특정한 소재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재현해 낼 것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은 감독의 영역이다. 타란티노는 영화가 판타지라는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자신의 폭력 취향을 즐긴다.

한때 ‘헤모글로빈의 시인’으로까지 불렸던 타란티노는 이제 성찰적 사색은 걷어내고 폭력의 스타일을 잔혹하게 즐기는 쪽으로 기울었다. ‘킬빌’이 잔혹한 액션 판타지의 수준을 넘어 ‘위험한 영화’이기도 한 이유다.

조희문 영화평론가·상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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