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아나디지(Anadigi)族의 세계

  • 입력 2003년 2월 13일 17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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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디지털 일방주의’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최근 빚어진 국내 인터넷 대란은 인터넷 파라다이스의 꿈에 젖어 있던 네티즌들에게 ‘사이버 공황’ 사태를 불러왔다. 이 와중에서 “디지털 세계로부터 타의로 퇴출돼 ‘인터넷 프리’를 경험함으로써 오히려 우리가 실제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새삼 되돌아 보게 됐다”면서 “아날로그 세계의 중요성에 새롭게 눈을 뜰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번 사태 이전부터 조용히 확산돼 온 이 같은 움직임은 컴맹의 변명이나 새 문명을 거부하는 ‘반동’의 목소리가 아니라 ‘고도로 발달한 디지털 문명인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현대 삶의 스피드 일변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느림의 철학’이 일정한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 지배당하지 않고 다스리기

회사원 김정호씨(30)는 하루에도 몇 번씩 ‘1인 다역(一人多役)’을 해야 한다. 4년 전 쓰기 시작한 메신저의 대화창을 열어 두고 거래처 사람과 대화하노라면 또 다른 창이 깜빡거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심할 때는 6명과 동시에 채팅한 적도 있다. 상대에게 대화에 충실히 임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면 이 창 저 창을 부지런히 옮겨 다녀야 한다. 메신저가 대중화된 뒤 업무의 상당 부분이 메신저로 이뤄지고 있어 꺼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화 도중에도 사무실 전화, 휴대전화는 쉴새 없이 울려댄다. 그는 “메신저를 쓰기 시작한 뒤로도 전화 통화는 10% 정도밖에 줄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가 쓰는 e메일 계정은 4개. 각 계정에는 매일 100통의 메일이 쏟아진다. 회사 계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쓰레기 메일. 하지만 간혹 예전 메일 주소만 알고 있는 친구들의 연락이나 유용한 정보가 배달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모든 편지함을 열어본다.

디지털 마인드에서 앞서 간 김씨는 인터넷, 휴대전화, 메신저 같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을 무척 반겼다. 하지만 이젠 처리 가능한 용량을 넘는 정보가 쏟아질 때면 디지털의 발달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김씨는 4개에 이르렀던 메신저 프로그램을 최근 2개로 줄였다.

르 코르동블루-숙명 아카데미의 김제세 총지배인(42)은 일찍부터 ‘디지털 프리(Digital Free)’의 꿈을 실현해 왔다. 286급 컴퓨터가 처음 나오자마자 컴퓨터를 썼고, 폴더형 휴대전화도 일찍 구입한 ‘얼리 어댑터’였던 김 지배인은 4년 전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뒤 새로 구입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시점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벨에 짜증이 나기 시작한 무렵. 휴대전화의 부재(不在)는 기대치 못했던 여유와 평안을 가져다 주었다.

당시 호텔 영업기획팀 소속으로 외근이 많았던 그에게 휴대전화는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번 되찾은 여유를 놓치기 싫어 휴대전화 사용을 포기했다. 공중전화를 찾아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신 행선지와 출발 시간, 도착 시간을 동료들에게 정확히 알려주는 습관을 들였다.

“완전히 연락이 두절되는 때는 차로 이동하는 시간뿐입니다. 길어야 1시간 정도죠. 1시간도 못 기다릴 정도로 급한 일이 살면서 얼마나 있을까요.”

처음에는 그와 실시간으로 연락이 닿지 않아 불편해하던 동료들도 차츰 아날로그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졌다. 컴퓨터도 점차 멀리하게 됐다. 꼭 필요할 때 e메일과 인터넷 검색 외에는 컴퓨터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는 “디지털 기기들을 배제할수록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혹 전화가 걸려오지 않을까 벨소리에 늘 신경을 기울이고, 놓치는 정보는 없는지 컴퓨터에 매달리던 초조함이 사라졌다는 것.

회사원 김씨와 김 지배인의 가장 큰 차이는 ‘외부에서 오는 정보를 자신의 의지로 통제 조절하느냐’ 여부다. 김씨는 과다한 정보에 지배당하는 반면 김 지배인은 정보를 다스리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한양대 유영만 교수(교육공학)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과다한 정보에 피로를 느끼게 되면 꼭 필요한 정보마저 소홀히 하게 된다는 점이 가장 문제”라고 지적했다.

● “우리집 전화번호가 몇번이더라?”

‘디지털 문명’이 중심 화두인 시대에 김 지배인처럼 아날로그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은 디지털의 발달로 인한 현대인의 피로감이 크다는 반증이다.

대표적인 ‘디지털 피로’는 어떤 정보든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 이지선씨(29·여)는 매일 아침 날아오는 뉴스 브리핑 메일과 영어 학원에서 보내주는 일일 학습 내용을 빠짐없이 폴더에 저장하지만 거의 보지 않는다. 이씨는 “저장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 습관적으로 저장한다”고 말했다.

유영만 교수는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 기능이 ‘정보 중독증’을 낳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계속 이어지는 링크를 따라 웹페이지를 옮겨 다니면서 눈에 띄는 정보를 무조건 ‘긁어서’ 폴더에 가져다 놓는 현상이 심해진다는 것.

최근에는 메신저 중독이 새로운 부작용으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 강남구 연세유앤김 신경정신과를 찾은 한 20대 여성은 “하루 10시간 가까이 메신저에 접속하며 메신저로 잡담을 나누는 시간은 2∼3시간 정도”라고 털어놨다.

기억 보조 장치의 발달로 인간의 기억력이 떨어지는 듯한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연세유앤김 유상우 원장은 “20, 30대 상담자 가운데 조기 치매가 아닌지 물어보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30대 후반의 한 환자는 “집 전화번호가 갑자기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고 호소했다. 휴대전화의 1번 버튼을 길게 눌러 연결하는 데 익숙한 탓에 유선 전화를 쓸 경우 번호가 떠오르지 않곤 한다는 것. 유 원장은 “휴대전화 알람기능에 의존하다가 기념일을 잊어버린다든지, 전화를 해놓고도 왜 했는지 금세 잊어버리는 증세까지 나타난다”고 말했다.

일본의 한 임상연구소는 이를 ‘IT 건망증’으로 규정했다. 미국에서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지난해 ‘과학 기술로 인한 건망증(technological amnesia)’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이 현상을 소개한 바 있다. 이 신문은 “어떤 학자들은 이 현상을 ‘인간과 기계의 결합’이라고까지 얘기한다”고 보도했다.

지하철에서 벨소리가 울리면 혹시나 하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본다든지, 조용한 공간에서도 벨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에 시달리는 것도 디지털 피로 가운데 하나다.

디지털 피로감이 커지는 이유 중 하나는 저장 장치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정보가 급증한 탓. 고려대 김성일 교수(교육학)는 “아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정보는 문제가 되지 않는데 온라인을 통한 네트워크가 복잡다단해지면서 모르는 이들로부터 오는 정보가 많아졌다는 점이 새로운 스트레스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러한 피로의 책임은 개개인에게 있다. 그 많은 정보를 가져오는 디지털 기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터넷정보센터의 지난해 말 조사에 따르면 인터넷 사용자가 2600만명을 넘어섰다. 그 가운데 인터넷을 매일 이용하는 사람은 71.8%. 2001년에 비해 9.4%포인트 늘었다. 평균 인터넷 이용 시간은 주당 13.5시간이며 10시간 이상 이용하는 사람은 전체 사용자의 절반을 조금 넘었다. e메일 계정은 평균 1.7개씩 갖고 있다. 3개 이상 보유한 사람은 전체의 14.2%.

개인휴대단말기(PDA), 휴대전화 등을 통한 무선 인터넷 이용자도 늘고 있어 정보 과다 현상은 더욱 심각해질 전망. 휴대전화 가입자수는 94년 100만명 미만이던 것이 10년 만에 3200여만명으로 증가했다.

● 아나디지를 꿈꾸는 사람들

유영만 교수는 “가볍고 빠른 정보가 판치는 현실에서는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태도가 밑받침되는 게 좋다”고 말했다. 디지털 문명을 거부할 수 없으므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적절히 결합해 적당한 선에서 디지털을 제어하는 이른바 ‘아나디지(Anadigi)’적인 삶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다음에서 활동 중인 동호회 ‘삐사모(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들은 아나디지적인 삶의 한 예를 보여준다. 휴대전화를 외면하고 호출기(삐삐)를 고집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시솝(회장)인 강동욱씨(27)는 “휴대전화는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고려하지도 않고 느닷없이 끼어든다는 점이 싫다”고 말했다.

호출기를 차고 다니는 ‘원시인’이라고 해서 다른 디지털 문명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인터넷에서 모임을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구보다 디지털을 잘 이용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신저도 즐겨 쓴다. 그는 다만 ‘필요치 않은 부분에서만큼은 의도적으로 한 박자 느리게 사는 방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게임업체 넷마블의 아바타 사업팀을 이끄는 최현미 팀장(29·여)은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10시까지 데스크톱 컴퓨터와 태블릿 PC 등 디지털 기기를 총동원해 아바타의 새 모델과 의상 등을 디자인한다. 디지털기기를 많이 사용하는 직업이다.

그러나 일단 회사를 벗어나면 ‘아날로그’로 돌아간다. 집에는 고장난 컴퓨터 한 대가 덜렁 놓여있다. 연결해둔 인터넷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끊겼다. 집에선 휴대전화가 울려도 좀처럼 받지 않는다. 사무실에서도 휴대전화기는 음성이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는 용도로만 쓴다.

“0과 1이라는 이진법으로 나누어진 세계 외에도 살아야 할 3차원 공간에서 할 일이 무척 많다”는 게 최 팀장의 생각.

그의 사무실 책상에는 어항이 하나 놓여 있다. 인형이나 화분도 책상 위에 자주 갖다 둔다. 아날로그적 감성을 덧입히기 위해서다.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도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된 경우가 많다. 컴퓨터에 ‘접속’해 알게 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오프라인 모임을 통한 ‘접촉’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 그렇게 해서 엮어진 사람들은 친숙해지면 온라인상에 또 다른 모임을 만든다. 그리고 또다시 현실에서 얼굴을 맞댄다.

디지털 만남인 ‘접속’, 아날로그 만남인 ‘접촉’이 반복되는 ‘접속-접촉-접속…’의 순환 고리가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휴대전화-PC에 지나치게 의존땐 기억 끄집어내기 힘들어▼

휴대전화, PC, PDA 등 디지털 보조 기기를 많이 이용하게 되면 뇌의 기억 기능은 떨어지는 것일까.

기억하고 있던 전화번호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지 않거나, 방금 들은 전화번호를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잊어버리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 한 번쯤 품어보는 의문이다. 어떤 이들은 조기 치매를 걱정하기도 한다.그러나 전문가들은 “보조 기기에 의존하는 비중이 커진다고 해서 기억력이나 뇌의 기능 자체가 퇴보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정신과 전문의 양창순 박사는 기억력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집중력’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양 박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하나의 원칙을 따른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것부터 우선 기억하려 한다는 것. 보조 기기에 담을 수 있는 정보는 ‘기억할 필요가 적은’ 정보로 인식돼 집중을 덜하게 된다는 얘기다.

이정모 성균관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출 연습’의 부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인출이란 머리 속에 저장된 내용을 탐색, 재구성해서 끄집어내는 과정을 가리킨다. 요즘은 보조 기기에 많은 정보를 담아 두고 있고,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되살려낼 수 있기 때문에 자연히 뇌속의 내용을 꺼내는 인출 연습을 게을리하게 된다는 것.

이 교수는 “그런 생활에 익숙하다 보면 직접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상황이 닥쳐도 인출에 애로를 겪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세유앤김 신경정신과 유상우 원장의 설명도 비슷하다. “기억이라는 뇌운동은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한 운동”이라는 것이다.

보조 기기의 활용이 뇌의 전반적인 활용에 도움이 된다는 견해도 있다. 김성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보조 기기는 기억에 대한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뇌를 다른 창의적인 일에 좀 더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고 말했다. 단 디지털 기기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는가에 따라 그 효용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 검색 키워드를 선택할 때는 깊이 고민하다 막상 검색 결과가 나오면 몇 줄만 훑어보고 마는 식의 활용 태도는 뇌의 활용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기억력 부분은 별개로 치더라도 수많은 정보에 노출됨으로써 뇌가 피곤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으로 꼽힌다. 양창순 박사는 “컴퓨터를 장시간 이용하는 사람일수록 밤늦게까지 컴퓨터를 사용한다”면서 “다른 신체와 마찬가지로 뇌는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한편 휴대전화 벨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에 대해 연세유앤김 신경정신과 유상우 원장은 “휴대전화를 많이 써서라기보다는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같은 다른 심리 현상이 환청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윤지현 사장, 홍진채, 신대성, 최만항씨(왼쪽부터)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보드게임을 즐기고 있다.

▼"PC방서 홀로놀기 지쳐" 젊은층 보드게임방으로 발길

이곳에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왁자지껄 떠들고 깔깔거리고. 한쪽 테이블에서 누군가 실수를 했나 보다. 일행이 “그게 아니잖아”라며 고함을 지른다. 그리고 또 한바탕 터져 나오는 폭소.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앞 일명 녹두거리에 위치한 보드게임방 ‘페이퍼 이야기’의 풍경이다.

보드게임이란 말 그대로 종이로 된 게임판을 놓고 여러 명이 함께 즐기는 게임. 주사위를 굴려 말을 진행하거나, 그림카드를 갖고 상대방과 수싸움을 벌이는 게임이다. 70∼80년대 인기를 끌었던 ‘블루마블’을 떠올리면 금방 이해가 된다.

지난해 4월 ‘페이퍼 이야기’가 생긴 뒤로 녹두거리에 모두 4곳의 보드게임방이 문을 열었다. 다른 대학가에서도 보드게임방의 인기는 점차 확산되는 추세. 전형적인 ‘아날로그’ 놀이가 ‘스타크래프트’ ‘리니지’ 같은 PC게임의 현란한 화면에 익숙한 신세대들에게 먹혀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 함께 할 수 있어 좋다

‘페이퍼 이야기’에서 만난 최만항씨(22·서울대 법학과)는 “여럿이 모이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게임을 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 혼자서 하는 PC게임에선 얻을 수 없는 소득이다.

홍진채씨(21·서울대 전기공학부)는 “PC게임은 혼자 하면서도 꼭 이겨야겠다는 부담감이 생기지만 보드게임은 경쟁심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승부는 가려지지만 경쟁보다는 함께 즐기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 “PC게임방은 분위기부터가 일단 험악합니다. 각자 담배를 입에 물고, 아무 말 없이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신대성씨(20·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의 생각도 같다. 그는 “모르는 사람과 동석해서 게임을 하다가 친해지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이들 3명은 모두 어려서부터 PC게임을 하면서 자란 세대.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점 말고도 보드게임이 PC게임보다 좋은 점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혼자서 할 수 없으니까 게임에 중독될 우려가 적다. 예의를 지킨다는 점도 좋다. PC게임을 할 때는 상대의 얼굴이 안보이기 때문에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이들이 얘기하는 보드게임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이곳 사장인 윤지현씨(31·여). 윤 사장은 프로게이머 출신이다. 서울여대 식품과학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 심리학과에 다시 입학했고 프로게임계에 입문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윤 사장은 한때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모니터 앞에 죽치고 앉아 있을 정도로 PC게임에 빠졌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함께 게임방에 가도 게임을 하다 보면 결국 혼자만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가 귀찮아진다는 점이었죠. 그러던 차에 우연히 보드게임을 접하게 됐고 더불어 하는 놀이의 즐거움을 알게 됐습니다.” 그 뒤로 윤 사장은 보드게임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 게임에서 세상을 배운다

보드게임의 역사는 500년을 넘는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발달해온 게임인만큼 온갖 지혜가 담겨 있다. 종류도 주식투자 추리 역사 전쟁 퍼즐 등 다양하다. 간단하게 주사위를 굴려서 하는 게임도 있고 고도의 전략을 짜내야 하는 게임도 있다. ‘페이퍼 이야기’에 있는 보드게임은 150종 가량.

윤 사장은 “이 좁은 게임판 위에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속출해 감탄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독일에선 어른과 어린이가 한데 어울려 게임을 즐긴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게임을 하는 동안 세상의 이치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최만항씨는 “게임마다 변수가 많아 사실상 게임의 종류는 무한대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돈을 쓰는 게임을 하며 합리적으로 돈을 모으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세계를 무대로 하는 여러 종류의 게임은 지리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울려 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사회성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된다. 신대성씨는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방식이라 참을성을 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PC게임을 할 때는 ‘속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홍진채씨는 “게임에는 대화가 필요하고 때로는 협력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회 생활에 필요한 협상 기술을 발휘해야 할 때도 있다.

사람의 성격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도 보드게임의 장점. 윤 사장은 “게임을 하다 보면 누가 욕심이 많은지, 양보심이 있는지, 협동심이 있는지 금방 알게 된다”고 말했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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