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SBS 창사특집극<빗물처럼>, '노희경표' 씻김굿

  • 입력 2000년 11월 10일 18시 57분


여자가 불을 끄고 돌아앉아 웃옷을 벗는다.

“온몸이 화상 투성이죠. 아무리 말해도 남자들이 믿지 않으니 이 방법 밖에 없군요.”

문간 구석에 앉아있던 남자는 그녀의 속살을 짓이겨놓은 화상자욱을 바라보며 놀란다.

“남자들은 그렇게 저를 원하다가도 제 몸만 보면 저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도망가죠.”

말없이 한참을 있던 남자가 입을 연다.

“많이 아팠겠어요.”

12일 밤 9시50분 방영되는 SBS 창사특집 2부작 ‘빗물처럼’(극본 노희경, 연출 이종한)은 우리네 삶에서 어쩔 수 없는 운명같은 상흔에 대한 이야기다.

미자(배종옥)는 어릴적 목욕물을 데우던 가마솥에 빠져 얼굴과 손발을 빼고는 심한 화상을 입은 여자다. 한때 진정 사랑했다고 믿었던 남자가 떠난 뒤 절망속에 혼자 낳은 갓난아이를 원망의 대상이었던 부모에게 떠맡긴 채 부두가 술집을 지키고 있는 그녀는 웃음은 팔아도 정작 몸을 팔 수 없는 작부다.

흘러흘러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지인(정웅인)은 지방대 시간강사. 어여쁜 아내와 귀여운 자식을 키우며 행복하게 살던 그는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자식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손으로 산소호흡기를 떼어낸 죄책감에 아내와 별거 중이다.

미자는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을 알면서도 부끄러움 때문에 지척에 있는 고향을 찾지 못하고 지인은 자기 손으로 자식을 거둬간 죄책감으로 아내에게 돌아가지 못한다.

‘빗물처럼’은 인생의 고통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작가 ‘노희경표’의 모던한 인간상과 토속적 영상세계로 유명한 이종한PD의 ‘자연’이 만나 질박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전반부가 좀 지루한 면이 있지만 쓰러진 볏단을 세우고 수확 끝난 감을 일일이 다시 나무에 달아매는 늦가을 풍경이 가을장마 빗줄기로 씻겨가는 감동을 놓치지 않으려면 좀더 진득해질 필요가 있다.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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