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하일지 「새」

  • 입력 1999년 7월 20일 19시 24분


소설의 주인공과 작가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경마장 가는 길’의 프랑스유학파 출신 시간강사 R를 그의 분신으로 보았다. 작가 하일지(44).

그런 사람이라면 하일지가 지난 학기부터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임용돼 전업작가 생활을 접었다는 소식에 “이제 냉소가 줄어들겠군”이라고 짐작할 지 모른다. ‘경마장…’에서 그가 극히 건조한 사실주의 어법으로 한국현실을 조롱하고 풍자했던 것을 상기하면서….

그러나 신작 ‘새’는 그런 예측을 배반한다. 아니 한 술 더 떠 현실과 환상, 사실과 비사실의 경계를 허문다.

16년간 다니던 증권회사에서 해직당하고 퇴직금마저도 친구 빚보증에 날리고 만 중년사내 A. 아버지는 치매상태고 회사 부하직원이었던 정부 지영은 임신했다.

그러나 이런 기초적인 얼개만으로 소설의 줄거리를 예측할 수는 없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길을 잃는 A. 쫓기던 소녀를 구해주지만 어떤 음모에 말려 남천이라는 곳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자신의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인을 만나고 세도가의 아들로 대접받다가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다른 남자가 가장 노릇을 하고….

소설 처음부터 A를 따라 다니던 불길한 검은 새. 소설 마지막에 A 자신이 그 새로 변해 과거의 A같은 중년남자의 뒤를 좇는다.

작가는 “오늘날 인간이 경험하는 불안 고뇌 욕망 등은 오래된 소설문학의 율법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소설문학의 오랜 율법을 어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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