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그룹 구조조정안 발표/위기 전말]

  • 입력 1999년 7월 19일 18시 27분


재계 서열 2위(98년 말 자산기준)인 대우그룹의 위기는 김우중(金宇中)회장의 사업확장 성향과 나라 전체의 외환위기, 그리고 정부의 일관된 재벌압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대우의 유동성 해결방안에 정부와 채권단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데는 ‘시간을 끌수록 어려워진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외신들이 서울의 외국계 금융전문가들을 인용, “대우 스스로의 구조조정이 한계를 맞았다”고 보도하기 시작한 것도 서둘러 대책을 내놓게 한 요인으로 보인다.

▽회사채 제한으로 자금난 촉발〓자금난의 뿌리는 대우가 정부의 재벌개혁 의지를 제대로 읽지 못해 비롯됐다는 것이 자금시장의 분석이다. 5대재벌 중 대우를 제외한 나머지 기업들은 “5대 재벌의 경우 자율적인 구조조정을 유도한다”는 원칙아래 재무구조 개선에 초점을 맞춘 정부의 압박공세에 대응, ‘시장재제’를 피하기 위해 유동성 확보를 서둘렀다.

반면 대우는 증권을 통해 지난해에만 7조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하는 등 차입경영을 계속했다.

대우증권 관계자는 “지난해 중반 재경부가 ‘금융기관 회사채 보유한도’를 설정하면서 유동성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대우를 겨냥한 조치라는 세간의 분석에도 불구하고 막상 당사자인 대우는 ‘가동률을 높여 수출(매출)을 늘린다’는 김우중식 IMF해법을 택해 자금난이 가중됐다는 것.

▽뒤늦은 구조조정〓대우자동차가 사활을 걸었던 제너럴모터스(GM)사의 외자유치가 물거품이 되면서 대우는 지난해 11월 ‘10여개 계열사만을 남기겠다’는 첫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삼성자동차 빅딜에 휩쓸리면서 주력 계열사의 자금흐름에 ‘경고신호’가 왔다.

정부의 적극 개입이 시작된 것은 이 즈음. 금융감독위원회는 1월초 올 상반기중 자금부족 규모가 3조5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집계되자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개혁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표나지 않게 자금을 지원하는 방안이 강구됐다. 수출입은행을 통한 연불(延拂)금융 지원 등이 이뤄졌지만 상환압력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숨가빴던 3개월〓청와대 등 정부의 압력에 떼밀려 4월19일 조선 상용차 힐튼호텔 등 알짜사업 매각을 포함한 2차계획이 발표됐다. 그러나 금융기관이 실현가능성에 낮은 점수를 매기는 가운데 6월30일 삼성차와의 빅딜이 무산, 자금난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됐다.

대우가 3,4일짜리 기업어음(CP)으로 부도위기를 넘기기 시작한 7월 들어 청와대 재정경제부 금감위 고위관계자들의 회동이 빈번해졌다. 청와대 재경부 쪽이 주로 강경입장(워크아웃)을 개진했고 현실론을 내세운 쪽은 금감위였다.

정부의 강경분위기를 읽은 대우는 사장단 대거 퇴진인사 등을 통해 구조조정 의지를 과시하는 한편 금융기관에 묶여있는 꺾기예금을 상환용으로 활용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김회장은 부평자동차 공장에 출근하면서 자동차사업 사수(死守)의지를 과시했지만 자금상황이 다급해지자 정부와의 담판을 준비했다.

김회장과 이헌재(李憲宰)금감위원장이 16일 오후4시 힐튼호텔에서 비밀 회동했다. 이어서 6시에는 청와대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 김회장은 2, 3개의 계열사를 제외한 나머지를 조속히 처분하고 사재를 다 털어넣는 ‘최후의’구조조정안을 내놓았다.

일부 정부인사들은 이날 오후부터 ‘워크아웃’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사재출연’ 가능성을 흘리기 시작했다.

협상은 주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금융시장이 받을 충격을 피해야 하는데다 구조조정을 이끌 적임자가 김회장이라는 판단에 따라 일종의 ‘경영권을 담보로 한 한시적 지원’쪽으로 결론이 났다.

〈박래정·정경준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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