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사랑 다룬 두 영화 「안나 카레니나」-「풍월」

  • 입력 1997년 9월 26일 07시 35분


높다란 벽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구중심처. 넓고 깊은 땅만큼이나 속내를 짐작키 어려운 대륙의 기질. 19세기말과 20세기초 시대변화의 덫에 걸린 러시아와 중국의 운명 또한 비슷했다. 낡은 지배체제는 전투적인 서양 열강의 진격과 국내 새로운 세력의 부상으로 급속하게 세를 잃어갔다. 레오 톨스토이의 고전을 영화화한 「안나 카레니나」와 첸 카이거 감독의 「풍월」은 이 시대의 흔들리는 귀족계급 여인을 주인공으로 비운의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1911년 러시아에서 영화화된 이후 수십차례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진 「안나 카레니나」. 프랑스 배우 소피 마르소는 30여년만에 영화화된 이 작품에서 그레타 가르보, 비비언 리 등 선배들에 이어 엘레강스한 귀부인 안나를 부활시켰다. 대지주 카레닌의 정숙한 아내이자 한 아들의 어머니인 안나. 집안일로 모스크바에 갔다가 오빠의 친구인 늠름한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불륜의 사랑은 그를 안정된 생활로부터 들어내 불안과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어쩌랴. 삶은 차가운 합리가 아니라 열정에 의해 끌려가는 것을. 로마노프 왕조의 수도였던 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의 장엄함과 오페라하우스의 화려함, 얼어붙은 러시아의 하얀 겨울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늘 그렇듯이 시대의 서사는 먼 배경으로만 남아있고 주인공들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최근 작고한 게오르그 솔티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불멸의 연인」의 버나드 로즈 감독. 안나의 의상이 주로 검은색이듯 「풍월」의 색조도 전체적으로 어둡다.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하야하던 날 밤 쑤저우(蘇州) 땅의 팡가 장원. 팡씨 집안의 촌락 공동체인 이 장원은 대를 이을 남자가 없어 여자인 류이가 맥을 잇게 된다. 수천명의 친족들이 받드는 자리지만 집안에 풍기는 아편 냄새는 옛 지배세력의 몰락을 암시한다.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류이는 올케의 동생인 충량에 대한 사랑으로 결국 파국을 맞는데…. 시대 변화속의 개인을 그린 「패왕별희」로 칸 영화제를 석권했던 첸 카이거 감독은 이 작품에서도 신구문화의 교체가 불러일으키는 고통과 불안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장궈룽(張國榮)과 궁리 주연. 중국의 옛 저택을 구석구석 황홀하게 비추는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가 신비한 음울함을 더한다. 〈신연수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