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삐삐로 초등생아들 원격조종 『학원가라』

  • 입력 1997년 3월 11일 19시 45분


『삐리리리∼』 11일 오후2시 학교운동장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놀던 K양(8·경기 고양시 호수마을)의 허리춤에 찬 삐삐가 울린다. 삐삐를 들여다보니「00」이라고 찍혀 있다. 『에이, 영어학원 갈 시간이잖아. 나 그만 가야돼』 K양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학원버스를 타기 위해 집으로 향한다. 요즘 삐삐를 차고 있는 어린이들이 많다. 서울 강남과 신도시지역의 초등학교에서는 1,2학년 학급당 3,4명이 이런 「삐삐 키드」다. 하루에도 서너개의 학원에 다니느라 정신 없이 바쁜 요즘 아이들. 그러다보니 지각을 하거나 엉뚱한 학원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노는 데 한눈 팔려서 또는 일부러 학원을 빼먹기도 한다. 학부모들은 고민끝에 「원격조정」 수단으로 삐삐를 생각해냈다. 효과는 만점. 초등학교 2년생 아들을 두고 있는 학부모 김모씨(33·여·서울 서초구 서초동)는 『요일마다 학원 과목이 달라 아이가 혼동하는 일이 많아서 지난달 삐삐를 사줬다』고 말했다. 학부모에 따라서는 「암호」를 정해놓는 경우도 있다. 가령 「00」은 영어학원을, 「11」은 무용학원, 「22」는 가정학습지 문제풀이를 각각 뜻하는 식이다. 두가지를 묶기도 한다. 「0011」은 「영어학원에 들렀다 무용학원에 가라」는 말이고 「0022」는 「영어학원을 마친 후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부모들은 큰 신경을 덜 수 있어 흡족해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올해 초등학교 입학선물로 삐삐를 「선물」 받은 박모양(8·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은 『처음에는 어른들처럼 삐삐를 차고 다녀 기분이 좋았지만 친구들과 마음껏 놀 수 없어 답답하다』고 시무룩해했다. 서울 신서초등학교 李敬太(이경태·55)교감은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삐삐라는 「족쇄」를 채워야 하는 교육현실이 안타깝다』며 『어린이들이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코 흘리며 마음껏 뛰놀던 시절이 그립다』고 말했다. <이명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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