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국립공원의 숨겨진 유적 자원 가운데 하나인 ‘수행굴(修行窟)’이 무분별한 탐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탐라시대부터 이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행굴의 유래와 용도 등을 규명하는 종합적인 학술조사가 이뤄지기도 전에 각종 유물이 사라지기까지 하고 있다.
● 유물유적 훼손 심각
굴 입구는 어른 1명이 허리를 굽혀서 들어갈 정도의 크기인데 막상 안으로 진입해보니 허리를 펴고 서도 천정이 닿지 않았다. 내부는 돔형으로 10여 명이 기거하기에 충분한 공간으로 보였다. 굴 입구에서 끝까지는 10여m, 좌우로는 20m 정도 됐다. 바위그늘이라고 하기에는 길이가 길고, 동굴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짧게 느껴졌다. 굴 끝부분에 뼈 모양이 선명한 길이 70㎝ 가량의 동물 사체가 보였다. 최근까지 누군가가 이용한 흔적으로 보이는 초 2개가 바위틈에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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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굴 학술조사 필요
수행굴은 조선시대부터 기록에 등장한다. 안무어사로 제주에 도착해서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1601년 한라산을 오른 김상헌(1570~1652)이 남긴 ‘남사록’에 수행굴에 대해 ‘굴중가용이십여인(窟中可容二十餘人) 고유고승(古有古僧) 휴량(休糧) 입서지처야(入棲之處也)’는 기록이 있다. 이를 두고 그동안 ‘굴속에 20여 명이 들어갈 만 하다. 옛날 고승 휴량이 들어가 살던 곳이다’라고 해석됐지만 ‘쌀미(米)’자가 들어간 법명이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휴량’은 스님 이름이 아니라 쉬거나 기거했던 곳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 기록에 따라 2001년 굴이 발견될 당시 수행굴로 불렸다. 1901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한라산 정상에 올라 높이 1950m를 측정한 독일인 지그프리트 겐테(1870~1904)는 여행기에서 “벌목꾼들이 살고 있는 굴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수행굴에서 잉크병으로 추정되는 파편도 발견되면서 겐테가 머물렀던 굴로 추정됐지만 반론도 있다. 겐테 기록에 따르면 그가 머물렀던 굴은 해발 1070m이고 나무꾼 23명과 수행원 12명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부엌을 따로 차릴 정도의 공간이었다. 수행굴과는 해발 고도에서 300m나 차이가 나고 굴 규모도 다르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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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