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는 외환위기의 학습 효과도 크게 작용하였다. 부채가 많은 주체가 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는 것을 경험했던 것이다. 이 교훈을 거울삼아 국내 기업은 부채비율을 낮추고 재무건전성을 높이며 절치부심해 오다, 이번에 세계 거대기업의 구조조정을 틈타 화려하게 글로벌 기업으로 부상했다. 올해는 전자 자동차 철강 등 주요 산업에서 한국 기업이 세계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한 원년 아니겠는가.
올해의 높은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규모는 여전히 세계 15위권에서 맴돌아 2000년대 초반의 10위권 수준을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 국민소득도 여전히 50위 내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여 G20 의장국의 품위(?)를 유지하기에는 크게 미흡한 셈이다. 우리 경제가 최근 10년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결과, 선진국보다는 높은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부상하는 신흥국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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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한국이 3만 달러가 넘는 고소득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해야만 한다. 성장뿐만 아니라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양극화의 해소, 부가가치가 높은 서비스 산업을 육성해야 경제의 선진화가 가능하다. 과거의 성장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선진화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변화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정부는 여전히 1970년대의 성장 패러다임으로 대규모 개발사업과 단기적인 성장에만 집착한다. 당장 내년에도 정부는 5% 수준의 높은 성장정책을 들고 나오겠지만 국내외 경제여건은 올해보다 더 어려워질 것 같다. 수출증가율이 대폭 줄어들고 물가의 상승 압력은 가중되는 등 주요 경기지표가 모두 올해보다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글로벌 경제 환경을 보면 내년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선진국 경제가 여전히 불안하고 국제간의 불균형도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미국경제의 더딘 회복과 양적완화 정책으로 달러화가 흔들리고 강대국 간의 환율을 둘러싼 전운(戰雲)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게다가 유로권의 재정위기가 간헐적으로 지속되고 중국도 과열된 경기를 진정시키고 있어 올해보다 우호적인 대외여건을 찾아보기 어렵다. 곳곳에 한국경제의 원동력인 수출에 치명적인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행여 세계경제가 의외로 조기에 회복된다 해도 갈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각국이 천문학적으로 풀어 놓은 통화를 환수해야 하고 막대한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문제가 재정정책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경기회복에 따른 수요 증대와 양적완화에 따른 달러 가치의 불안이 원유와 원자재 가격 등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주도할 것이다. 모두 경제의 불안정성을 확대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제약하는 요소다.
그렇다고 국내 경제여건이 크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올해 각종 경제지표에 화려하게 나타났던 기저 효과의 마술도 사라진다. 올해는 경제 침체가 극심했던 2009년을 기준으로 성장률을 계산했지만, 내년의 경제지표는 올해가 기준이 되어 기저 효과가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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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변화 외면땐 日처럼 될수도
이런 여건에서 정부가 높은 성장률이나 과거의 성장 패러다임에 집착한다면 또 다른 거품을 키우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내년은 단기 성장이나 인기에 연연하지 말고,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책 모델을 선보이는 원년이 되어야 한다. 한국경제는 지금 고령화와 잠재성장률의 하락으로 빠르게 역동성을 상실하고 있다. 이런 구조 변화에 지금부터 대응하지 않는다면 자칫 불황의 패턴마저도 일본을 답습할 우려가 없지 않다.
정갑영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