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gA.com

2014-08-14 03:00:00 편집

프린트닫기

[Narrative Report]한글 몰라요, 삼남매 사랑밖에 몰라요… 아빠는 외국인 싱글대디

김혜나 양(오른쪽)이 방글라데시 출신 아빠 비플람 칸 씨(왼쪽), 막내동생 혜준이(가운데)와 함께 혜준이의 초상화를 잡고 웃고 있다. 칸 씨는 임대아파트에서 기초수급자로 어렵사리 살아가고 있지만 그의 꿈은 부자가 되는 것도, 아이들이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자녀들과 같은 국적과 성(姓)을 갖고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일생의 유일한 소원이다. 인천=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 “저기요. 제가 한글을 모르는데요. 여기 내비게이션에 주소 좀 찍어주실래요?”
오늘도 아빠는 낯선 행인을 붙잡고 부탁한다. 1t짜리 트럭에 고물을 잔뜩 실은 채….
행인은 얼굴이 까무잡잡한 아빠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목적지가 적힌 종이를 건네받는다.
내비게이션을 꾹꾹 눌러 주소를 찍어준다. 아빠는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며 출발한다.
‘목적지까지 14.3km. 500m 직진하다가 좌회전. 도착 예정시간은 2시38분….’
까막눈 아빠의 일상은 이렇게 굴러간다. 내비게이션 소리를 들으며 운전하고,
글을 읽어야 할 때는 주변 사람에게 묻는다. 집에 오면 아빠는 내게 휴대전화를 건넨다.
“문자가 왔는데, 뭐라고 써있는 건지 읽어봐 줘.” 늘 비슷한 문자다.
고물상에서 보내는 고철값 정보, 그리고 광고와 스팸 문자….
방글라데시에서 온 아빠의 이름은 비플람 칸(45). 한국인과 결혼해 삼남매를 뒀지만,
우리 삼남매의 주민등록등본에 부모의 이름은 없다.
아빠는 외국인이라, 엄마는 우리와 같이 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세대주’로 기재돼 있다.
내 이름은 김혜나, 나이는 열여덟이다. 》  

○ 한국에서 인연이 싹트다


“하고 싶은 것 있으면 들어줄게. 원하는 것 있어?”

1991년 방글라데시 다카. 아빠가 몸담고 일하던 회사의 사장은 이렇게 물었다.

“외국에 가고 싶어요. 아무 나라나 좋아요. 돈 벌어서 고향에 돌아오고 싶어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말하는 스물두 살의 아빠를 사장은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국을 오가면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비행기표를 사서 아빠를 한국에 보내줬다.

아빠는 관광비자로 입국해 경기 부천시의 인쇄공장에 취직해 페인트칠을 했다. 이주노동자를 보는 눈길이 바닥이던 시절이었다. 공장 사장은 3개월간 월급도 안 줬고, 밥도 제대로 안 줬다. 가끔은 때리기도 했다. 그는 참다못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말했다.

사장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월급을 내줬다. 아빠는 인천 계양구로 떠나 보온병을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일하던 엄마(38·김모 씨)를 만났다. 엄마는 집안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때부터 일을 해왔다고 했다. 함께 바람을 쐬러 다니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함께 살기 시작했다. 칸 씨가 불법 체류자였기에 혼인신고도 결혼식도 못했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년 뒤 아빠는 사법당국에 의해 불법 체류가 적발됐고, 강제출국 당했다.

○ 다시 가족의 품으로

“딸은 버리고 한국 남자랑 결혼해. 그 남자는 외국인이고 얼굴도 까매서 싫어.”

아빠가 떠나자 이모들이 엄마에게 이런 말을 쏟아 놨다. 줄곧 결혼을 반대해온 터였다. 아빠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아내는 한국 남자에게 시집갔을 거야. 딸도 버렸겠지. 나 같은 건 잊었겠지….’ 방글라데시에서 음울한 한 달이 흘렀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자기야, 나 왔어.”

엄마였다. 한 살배기 딸을 안고 무작정 방글라데시로 와 공항에서 전화를 건 것이었다. 아빠는 전화를 끊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은 공항에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엄마 아빠는 이때 방글라데시에서 2년을 살았다. 불법 체류 전력이 있는 아빠는 2년간 비자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힘들고 고달팠지만, 가족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2년 후 아빠는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이민비자를 받아 한국에 입국했다. 엄마 아빠는 과거에 살던 인천 계양구의 병방시장 인근 집을 찾았다. 집주인은 반가운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혜나 아빠 왔다∼∼!”

집주인은 갑자기 시장으로 뛰어 들어간 뒤 상인들에게 쌀과 고추장, 이불을 받아 선물로 건넸다. 심지어 집 보증금(300만 원)도 받지 않고 10만 원 남짓의 월세만 받았다.

얼마 후 동생 혜린이(14)가 태어났다. 우린 아빠의 얼굴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아빠가 매일같이 야근을 했기 때문이다. 월급은 180만 원. 밥 먹듯이 야근을 하면 200만 원을 넘게 번다. 아빠는 가족들을 보고 싶었지만 잘 살아보겠다며 늘 야근을 하며 살았다.

○ 엄마가 떠나다

평탄한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빠는 몇 달 뒤 털썩 주저앉고야 말았다. 3개월 치 월급 지급을 차일피일 미뤄오던 사장님이 도망을 간 날이었다. 800만여 원이 공중으로 증발했다. 창고 같은 집이었지만 월세조차 낼 수 없었다. 쌀값도 없었다. 아빠는 중얼거렸다.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면, 월급을 못 받을 수 있겠지. 이젠 박스를 주우러 다닐 거야.”

그는 힘을 내서 리어카를 끌기 시작했다. 박스와 고철을 팔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얼마 후엔 막내 혜준이(8)가 태어났다. 돈을 모아 빌라로 이사했고, 컴퓨터도 한 대 샀다.

안 좋은 일은 또 찾아왔다. 2008년 9월, 아빠는 고철을 줍다가 철근에 발이 끼었다. 한 달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아빠는 이때 입원실에서 잠을 자다 악몽을 꿨다. 불길한 예감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아빠는 이때 엄마와 티격태격하다가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었다.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배신감에 몸을 떨며 “그럴 거면 집을 나가라”고 말했다. 엄마는 진짜 떠나고 말았다.

○ 또다시 찾아온 시련

엄마가 떠난 뒤 6, 7개의 우편물이 날아왔다. 우리들 명의로 각각 3, 4개씩 개설된 휴대전화 요금 고지서였다. 우리에겐 휴대전화가 없던 때였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니 엄마가 한 일이었다. 전화요금만 수십만 원씩 됐다.

‘신용정보’라고 써진 우편도 배달됐다. 엄마가 갚지 않은 카드 빚이었다. 가족이 갚아야 할 금액은 총 800만 원이 넘었다. 엄마는 전화로 “미안해. 다 갚을게”라고 말했지만 이후엔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혼자서 애들 셋을 키우는데, 당신이 그렇게 하면 힘들어. 이혼해줘.”

엄마는 우리들을 안 키우겠다고 말했다. 이혼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나는 빨리 돈을 벌어 아빠를 돕고 싶어서 인천의 한 미용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로부터 “3년간 학교를 다니려면 미용재료비를 포함해 378만 원 정도가 든다”는 말을 들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학교를 잘 다닐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결국 자퇴를 해버렸다.

우리 가족은 기초생활수급자다. 정부에선 매달 쌀과 현금 2만∼3만 원을 줬다. 아빠는 우리에게 비싼 옷이나 식사는 못 사줬지만 가끔씩 차에 태워 바람을 쐬게 해줬다. 가족이 가진 1t트럭은 찌그러졌고, 삼남매를 태울 자리도 없었다. 아빠는 어렵사리 400만 원을 모아 승용차를 한 대 더 샀다. 그러자 승용차를 소유했다는 이유로 곧바로 기초수급자에서 탈락됐다.

아빠는 기초수급자일 때 병원에 갈 때마다 진료비를 2000∼3000원씩 냈다. 수급자에서 탈락된 뒤엔 4만∼5만 원씩 내야 했다. 아빠는 고물을 줍다 보니 목이나 허리가 자주 아팠다. 결국 75만 원이라는 헐값에 자동차를 팔아야 했다. 우리 가족은 다시 기초수급자가 됐다.

○ 다시 일어서는 가족

아빠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신용카드를 만드는 것도, 대출을 받는 것도 곧잘 거절당했다. 우리들과 지내려면 1∼2년마다 인천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아 비자도 연장받아야 했다. 한국인으로 귀화하고 싶었지만 삶에 치이다 보니 여력이 없었다. 아빠는 2011년이 돼서야 귀화신청을 했다. 집에는 법무부에서 보낸 귀화 필기시험 안내문이 날아왔다.

아빠는 말은 한국인처럼 구사하지만, 글은 모른다. 어두운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말했다.

“무서워서 시험장에 못 가겠어. 글을 모르니까 식은땀 나고, 병원에 실려 가면 어떡해?”

아빠는 긴장하면 부들부들 떨고 식은땀을 흘리는 체질이다. 결국 시험장에 가지 않았다.

법무부는 이민자가 한국생활에 필요한 언어와 문화 등을 배우는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이수하면 귀화 필기시험을 면제해준다. 아빠는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큰맘 먹고 올해 5월부터 경기 부천시의 경기글로벌센터를 매주 찾아 한글을 배우고 있다.

센터의 송인선 대표님은 내게도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주배경청소년들의 학업을 돕는 프로그램도 소개했다. 나도 그렇게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아빠는 45세가 돼서야 처음으로 ‘가나다라’를 배우고 있다. 가끔 나머지 공부도 한다. 우리 삼남매는 아빠의 이름이 우리들처럼 ‘김○○’로, 주민등록등본에 세대주로 올라 마음 편히 살 수 있기를 기원하며 아빠를 응원한다. 아빠는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난 다른 꿈이 없어요. 아이들처럼 한국 사람이 돼서 함께 사는 거예요. 내 핏줄이 한국에 있잖아요. 아이들만 보면 힘든 게 모두 사라져요.”

인천=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Copyright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